심사 둘러싸고 파장으로 점철 근대 미술연구소서 「국전30년」을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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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올해로 30년을 맞았다. 민족미술의 방향설정을 위해 1949년 문교부에 의해 마련된 국전은 그 숱한 공과를 마무리짓는 하나의 이정표를 세울 시기를 맞이했다. 한국근대미술연구소(소장 이귀열)는 문예진흥원에서 출판 비를 보조받아 종합적인 국전자료집인 『국전 30년』을 펴냈다. 그 내용을 요약한다.
l949년11월 동양화·서양화·조각·공예·서예 등 5개 분야를 대상으로 처음 실시된 국전은 1955년 제4회 국전에서는 건축 부를,1963년 제13회 국전에서는 사진부를 선설, 그 영역을 점차 확대해갔다.
그러나 국전은 당시 활동하고 있던 많은 기성작가들에게 동등한 자격으로 다함께 참여하도록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첫 출발부터 국전 파를 만들고 말았다.
국전에서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는 바로 심사위원 구성. 심사위원 구성을 둘러싼 세력 다툼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l956년 체5회 국전 때부터다.
국전을 주도해가던 대한미술협의 중도파 고의동·도상봉씨 등이 홍대파와 밀착되는 양상을 보이자, 서울대미대파는 한국미술가협회를 만들어갈라졌다.서울대미대학장이며예술원회원이던 장발씨가 한국 미협을 이끌면서 서예가 손재형씨와 제휴, 예술원에서의 로비활동을 벌여 5회 국전의 심사위원 을 한국 미협측이 많이 차지하게 했다.
이에 대한 미협은 국전보이코트를 선언하는 등 팽팽히 맞서, 문교장관이 「국전무기연기」를 발표하고 국회문공위에서는 「국전분규수습소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큰 물의를 빚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은 결국 대한 미협측에서. 심사위원3명을 추가토록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으나 한국 미협측 회원 수십 명이 이에 불만, 출품을 거부하는 소란이 빚어졌다.
이 같은 심사위원 자체 내에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심사의 불공정성을 항의하는 출품자도 잇달아 생겨났다.1954년 정진철·김화경씨 등 동양화가들이 화신백화점화랑에서 벌인 「낙선작품전람회」가 집단합의의 효시.
16회 국전에서는 또 한차례의 「국전 동양화낙선작품 전」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때 시위를 주동했던 이령수·심경자·이경수씨 등은 『채색화작품과 현대적 방법의 작품들이 외면 당했다』고 항의했다.
심사에 대한 항의전의 하이라이트는 재20회 국전에서 벌어졌다. 일단의 서예부 낙선자들은 신세계 화랑에서 「국전 낙선작 서예평가전람회」를 꾸미고 그해 국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유희강 김응현 석경륜씨를 초청, 재심사를 받아 당선작을 결정해 일대 화제가 되었었다.
그러나 제10회 국전에서 김형대씨의 『환원B』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을, 제18회 국전에서 박길웅씨의 『흔적백-F75』가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순수추상 회화가제대로의 평가를 받음으로써 보수적인 국전이 커다란 변혁울보여존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국전내상과 관계없이 불미스러운 일로 지적되는 것이 바로 두차례의 도난사건.
제14회 국전에서 공예부 추천작가인 민철홍씨의 청동칠보무늬 『과반』 청·홍 1쌍이 전시 중 도난 당한 것을 시작으로 78년에는 l백59점의 전시품 중 58점이 도난 당하는 수난이 연달았다.
충남 대전여상 실내체육관에서 폐막을 하루 앞두고 일어난 이 최대의 국전도난사건은 아직까지 그 범인이 잡히지 않은 채 미궁에 빠져있다.
문교부→문공부→문예진흥원으로 그 주관 부서가 이동되면서 그때마다 극심한 분쟁에 휘말렸던 국전은 l974년부터 현 체제로 정비돼, 운영을 계속 해오고 있다. 30년을 맞는 올해 국전의 체질개선을 위한 어떤 계기가 마련돼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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