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탈의 옛 모습 이어가는 장인들|고성군 봉암리 오광대 탈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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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각종의 전통예술 영역 중에서 탈춤만큼 민중의식을 충실하게 표현하고 사회를 비관하는데 과감한 태도를 보인 것도 없다.
들일에 그을은 흑갈색 얼굴에 툭 불거진 코, 세근쯤 돼 보이는 입술, 쭉 찢어져 올라간 눈꼬리가 영판 상놈의 상판인 말뚝이탈.
돈냥이나 있어 뵈는 누런 얼굴에 검은 주름, 턱 밑의 염소수염이 걸맞은 양반탈. 어머니는 하나인데 아버지는 둘이라 얼굴 왼쪽은 흰색, 바른쪽은 붉은 색인 일교지자의 홍백양반탈.
한데 어우러져 주고받는 가락은 농민들의 양반에 대한·통렬한 카타르시스요 연극적으로 표현된 희극적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설 같은 가락이 끈끈하게 묻어나는 고성오광대 놀이에는 그 탈 제작에 신명을 바친 외길 인생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경남 고성군 동해면 봉암리에는 고성탈놀이 중 「말뚝이역」의 기능보유자이자 탈 제작의 정통전수자인 허종복씨(54·인간문화재 171호)와 그 제자들이 오늘도 오동나무를 다듬으며 민중예술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오광대탈의 산실은 허씨 소유 3평 남짓한 오두막.
『탈은 만드는 게 아니라 분만하는 기라. 진통이 없으면 좋은 것이 안 나온데이.』
허씨는 고성오광대 탈을 만드는 데는 임산부가 임신 중에 지켜야하는 것과 같은 태교가 있다고 한다.
그 첫 째가 무작위의 작위. 손놀림에 혼이 깃들어 잡은 칼과 손놀림이 일체가 되어야한다.
허씨는 탈을 만들기 전 반드시 꼭두새벽에 일어나 우물물로 심신을 씻고 한복으로 차려 입는다.
『마음이 심란하면 안되는 기탈이라. 손이 이리 갈라카머 저리 가고 얕게 팔라카머 깊게 패이고, 홈을 얇게 밀라카머 굵게 밀리는 기라.』
무아의 지경에 이르면 이틀에 목탈 한 개를 만들지만 잡생각이 들면 1주일이고 열흘이고 도구를 잡지 않는다.
『저 양반탈만 지고 나서는 사는 기 바로 고생이라요. 모내기철에 모를 심읍니꺼, 추수철에 곡식을 거둡니꺼. 한 번 잡았다카머 탈 망그는 창고에서 하루고 이틀이고 묵고 자는기라요.』 허씨의 뒷바라지에 나이보다 10년은 늙어 보이는 부인 박감수씨(53)의 탄식이다.
목탈의 재료는 오동나무.
밑동의 큰 것은 말뚝이·중·원양 반탈로 만들고 중간 크기는 젓양반과 갓양반, 작은 것은 제자각시·소무를 만든다. 반조각으로 쪼갠 나무도막은 자귀로 쪼아서 대강 얼굴형을 만들고 호미모양의 홀개로 안을 파낸다.
일단 형이 잡히면 장인의 분만진통은 시작된다.
아귀에 힘을 주어 쥔 조각도로 코 부분을 파내 탈 전체의 균형을 잡고 이마·눈자위·입술을 차례로 갉아낸 뒤 뺨을 다듬어 매끄럽게 매만질 땐 진통에 겨워 숨을 몰아쉰다. 하나의 흠집이라도 탈의 생명을 끊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둥이탈의 부스럼 36개를 위치에 맞춰 일일이 조각할 땐 손등에 힘줄이 서고 미간이 끊어질 듯 통증을 느낀다.
할비비로 눈을 뚫고 얼굴에 주름을 파내면 아교단청.
색색으로 단장을 해서 음지에 말린 뒤 탈보(탈의 뒷헝겊)를 꿰맬 때는 장인 탯줄을 끊는 아픔에 허탈해진다.
고성오광대탈 한 벌은 20개. 제작하는데 빨라야 50일 정도가 걸린다. 『맨들기는 입 비뚤어진 비틀탈이 제일로 힘들고 색칠하기는 영노 비비탈이 어렵니라. 그래싸도 정성이 가기는 말뚝이탈이지. 인지상정이라 내가 쓰는깅께 어쩔 수 없는 모양이제.』
허씨는 고성오광대탈의 특징은 가산·통영·진주 오광대 탈과 모양이 다른 점도 있지만 귀를 따로 만들지 않고 모양만 조각하는 점이라고 했다.
허씨가 이제까지 만든 탈은 20여벌 정도. 대부분 오광대놀이 출연을 할 때 새것으로 갈기 위해 만들었고 일부 외지에 나간 것도 돈을 받고 판 적은 없다.
문화재를 아는 사람들이 허씨가 만든 탈을 놓고 지탈은 1개에 2만5천원, 목탈은 4만원은 호가한다고 감정했지만 아직도 자신의 분신과 같은 탈을 팔 생각은 없다고 했다.
허씨가 탈 제작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16년 전. 작고한 탈 제작의 명장 홍성락씨에게 전수 받았다.
5세 때부터 농악대를 따라다니며 덧배기춤을 배운 허씨는 『양반의 핏줄을 흐린다』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다니며 6l년부터 오광대 놀이에 어울렸고 손재주가 뛰어나 어깨너머로 탈 제작을 배웠다.
오광대탈의 유래는 이조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해 낙동강에 홍수가 났을 때 큰 궤 하나가 떠 내려와 경남 섬천군 덕곡면 율지리 초계 밤머리에 닿았고 열어보니 오광대 탈과 대사 집이 들어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성오광대 탈은 한일합방 전 목수 김인창씨가 만들었으나 일제침략 이후 문화말살책에 의분을 참지 못해 원형을 몽땅 강에 버렸고 그 후 홍성락·천세봉씨에게 이어졌다가 허씨에게 전수됐다.
허씨의 제자는 현재 3명.
남방양반역을 맡고있는 박갑준씨(56)는 10년 전에 전수 받아 현재 지탈을 제작하고 있고 1년 전부터는 북방양반역의 장용만씨(51)와 막내아들 순도군(19·고성고교 3년)이 배우고 있다.
3남l녀의 자녀 중 2남 성도군(22·경상대 1년)에게 오광대 장구반주를 가르치는 허씨는 『남들이사 자슥한테까지 뭐할라꼬 광대짓을 가르치냐카지만 내 좋아서 하고 자슥들도 배우겠다는데 와막겠노』라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물려받은 밭과 논 10마지기로 어렵지 않게 사는 허씨는 분기별로 지급하는 기능보유자 생계보조비(11만원)도 전액을 목탈 재료인 오동나무 구입에 써버린다.
『내 죽기 전에 달 맹그는 법을 책으로 내는 게 꿈이다. 이제까지 눈으로 익혀서 배우는 깅께 자꾸 원형이 변해서 보존이 안 되는 거 아이가.』
허씨는 요사이 부잣집 벽에 걸린 원형미상의 탈을 보면 걱정이 태산같다며 원형보존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 <고성=엄주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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