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최고야…"(8)조리 대나무 숲서|복을 고루 받는다-보은군 내속면「본조리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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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오리 숲 사이로 목탁소리가 들린다. 세속미진(세속미진) 떨치고 제 모습 본대로 돌아가는 속리산-.
속리산엔 눈이 푸짐히도 내렸다. 법주사를, 정이품(상두) 소나무, 천황봉 이마에도 온통 흰떡가루를 쓰고 있다. 산 이름 그대로 이속(이속) 탈속(탈속) 의 경지.
20리 묘봉 골짜기의 하늬바람이 구곡양장(구곡양장) 말티재를 사정없이 몰아쳐도 한겹 문풍지 안에선 소박한 서민들의 새해 소망이 소복소복 영글어 간다.
구정이 앞으로 보름 남짓.
바지런한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한올두올 엮어져 쌓이는 소담한 복조리. 정월 초하루 첫 새벽, 수닭이 홰칠 때 한 쌍을 문 앞에 걸어두면 그해 만복을 맞는다는 우리네 복조리다.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송내리 민판동「복조리 마을」-. 서민들의 애뜻한 소망을 정겨운 풍물에 담아 구점 아침마다 전국 방방곡곡에 복을 나눠주는 마을이다.
『마을의 내력이며 언제부터 복조리를 만들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아버지에게서 삼는 법을 배웠고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배웠을 뿐입니다』이 마을 권영식씨(38)는 조리재료인 조리대나무가 속리산에 무진장 자라는 것이 조리마을이 생긴 연유 같다고 한다.
모두 해야 30가구. 김·이·박·권·주 각성받이가 『콩 한쪽도 나눠먹는』정으로 똘똘 뭉쳐 산다. 산비탈에 일군 5만여 평의 논밭에 추수가 끝나도 어느 손 하나 노는 일이 없다. 그네들 사는 형편이 북을 나눠주는 복조리마을 사람답다.
『우리 마을엔 농번기·농한기가 따로 없어요. 논밭 일이 끝나면 1년 내내 산에 오르며 양식을 거둡니다』이장 주고봉씨(43)는 이른 봄 산채 따기, 여름엔 송이채취, 겨울엔 조리 만들기로 가구 당 2백여만원의 소득을 올린다고 한다.
복조리 만들기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바로 시작, 구정 전까지 밤샘을 한다. 아이들은 대를 가르고 여자들은 바닥을 다듬고 남자들은 조리를 튼다.
속리산 골짜기에 지천인 조리대나무는 키가 lm 남짓에 직경이 7mm정도. 부드러운 l년생이 적격이다. 네폭으로 가른 푸른 대는 열흘쯤 햇빛을 쬐면 노르스름하게 변한다.
말린 대는 10시간쯤 개울물에 불려 부드럽게 한 뒤 바닥제기를 한다. 싸릿대 토막을 앞 부리에 넣고 호리남창 가느다란 대쪽을 엮기 시작한다.
엮기기 끝나면 남자들의 억센 손아귀 힘으로 양족 귀를 틀어 조리모양을 만든다. 양쪽 대쪽을 엇갈리게 싸잡아 세번 매끼를 틀면 옴폭하고 소담한 복조리가 된다.
『마지막 들어 국기는 젖먹은 힘까지 내야 모양이 나는 법이여. 까시락이 안 일도록 솜씨있게 매 잡야지』 7세 때부터 복조리 엮기를 했다는 정기술 노인(72)의 조리맵시 비법이다.
구정 때까지 이 마을에서 내는 복조리는 7만5천개. 남자 혼자 하루종일 엮어 1질(50개)을 만든다. l질 값이 7천원으로 복조리로만 한가구가 50만∼70만원의 수입을 올린다. 물감들인 장식용·소형·대형 세가지를 만들지만「플래스틱」조리에 밀려 부엌용보다는 장식용으로 쓰인다. 지난해 미국 등 해외수출은 1천만원 어치.
작년7월 마을이 생긴 후 처음으로 수해를 입은 민판동은 30가구 중 9가구만 남고 몽땅 물에 쓸려갔다. 『목숨만 건진 것도 다행』이라는 김병혁씨(48)는 새살림 장만을 위해 어느 해 보다 손놀림이 더 발라야겠다고 한다.
섣달그믐, 손마디에 군살이 박이며 엮은 복조리가 산더미처럼 차에 실려 떠나고 나민 동네 사람들은 집집을 돌며 지신(지신) 밟기·농악놀이로 연중무휴의 휴식을 즐긴다.
대나무 나는 산이 곳곳에 달려있고 그곳 역시 조리를 삼지만 어째서 속리산 복조리가 복을 준다고 믿었을까.
법주사아래 자리한 월 아래 마을(사하촌)이고 보니 부처의 자비가 조리에 담겼나 보다. 천수를 누리는 정이품 소나무가 있어 수명 장수의 복이 담겼나 보다. 아니면 노송이 벼슬을 땄으니 삼라만상(삼라만상)이 다 벼슬을 따는 관운복(관운복) 때문일까.
절 아래 마을이면서도 관광객 주머니를 가볍게 하지 않는「복조리 마을」. 숙박업·술집·기념품 가게들마다 하고 l년 내내 산과 논밭과 함께 땀 흘리며 사는 이들. 손마디에 피맺히며 우리네 풍물을 지키는 마을 사람들의 심지(심지)가 진정 복조리에 담겨 복을 가져오는 것 같다. <보은=문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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