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월탄은 중앙일보창간호부터 『아름다운 이 조국을』이라는 인상적인 제목의 장편소설을 연재했었다. 『우리들은 어째 이리 가난해야만 하는가. 어째 이리 뒤숭숭하기만 한가. 나 자신을 반성하기 위해서 내조국의 근대를 그려보기로 한다. 작자의 말은 새삼 그의 작가적내면을 엿볼수 있게한다.
그후 15년, 그는 이제세상을 떠나갔으나 『가난하고 뒤숭숭한 조국』에 대한 그의 애착엔 변함이 없으리라.
그러니까 그는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살았던 20세기의 증인이요 한국현대문학을 지켜온 거목이었다.
그에겐 극히 간결한 문학관이있다. 『역사의식이 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다.역사소설을 즐겨 쓴것도 그때문이다.『역사소설의 형태를 빌어 문학으로 사회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금삼의 괴』가 그렇고 『대춘부』가 그렇고 『다정불심』이 그랬다. 또 『홍경내』나 『여인천하』 『임진왜란』과 『세종대왕』이 모두 그의 역사의식이자 문학정신이었다.
그의 민족정신은 일제말 창씨개명 강요속에 의연히 이름을 지켰던 몇 안되는 한국인이 었던데도 드러난다. 그의 『상부탄」은 그때의 심정을 『오호, 님위해 굳게 닫힌 정열의 얼부풀은 창문이 하마터면 열릴뻔 했소』하고 은유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진면목은 그의 인간적 역정에서 두드러진것 같다.
그는 어릴적부터 달을 무척 좋아했다. 『그 둥글고 인자하고 환한 모습으로 인간세상을 굽어보며 휘영청 밝은 빛을 상라만상에 차별없이 비쳐주는 평화롭고 어진 보습이 좋다』 고 달예찬을 하던 그다.
달과 물의 오묘하고 청신한 철리를 깨달아 1920년 처음 현대시를 쓰면서 아호를 「달 여울(월탄)」이라 짓기도 했다.
서울 남대문밖 잠바위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여기서 세상을 떠난 그는 순 서울토박이요, 이름난 효자였다.
차자였던 그는 30살이후에 딴살림을 했으나 날마다 한번썩은 부모를 뵈러 큰댁에 들렀다고 술회한 적도 있다. 그때 『감기들라, 땀 들이고 나가거라』하는 부친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 그는 한참 자리에 앉았다 집으로 들아오곤 했다고도 한다.
그는 정치에 유별나게 관여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초연하게 이상과 정의를 외치지도 않았다.
그가 원로다운 품위를 지키고 창작에 전념하며 그의 당호처럼「조수옹」의 여유를 가졌던 것은 그 부친의 유지를 받든 때문이 아닐까.
달포전 몸이 불편해진 것을 느끼면서 그는 『천수를 다한것 같다』고 복받은 그의 일생을 고요히 정리하는 마음가짐이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현대에 드물게 보는 대과없는 「한국인상」이 아닐까 보여진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