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 풍경] 사단장이 보초 서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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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윤선도의 섬 보길도. 오우가, 어부사시사 그리고 부용동…. 최근 유행하는 말로 우리네 '코드'와 잘 맞는 이름과 제목들이다. 요즘 문재인 청와대 수석보다 바쁜 사람은 없다.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면 그의 보길도행은 탁월한 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보길도행이 '보길 상수도 대책위'주민들을 만나 지역 내 댐 증축 문제로 야기된 시비를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니 '창조적 휴식'과는 영 거리가 멀다. 33일째 단식 중이던 보길도 주민 강제윤씨에게 '대통령 말씀'을 전하고 단식을 중단시켰다는 것 또한 대단한 성과라면 성과다.

그러나 "사단장이 보초를 서면 그 군대에는 희망이 없다"는 표현이 요즘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때는 없었다. 작전상황실을 지켜야 할 사단장이 동서남북 뛰어다니며 보초나 선다면 그 군대의 앞날은 어둡기 그지없다.

제주도를 푸대접한다는 이유로 마라도 주민이 단식을 한다면 청와대는 또 다른 헬기를 띄워야 할지도 모른다. '대통령 말씀'이 아니면 국민들은 단식을 그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런던과 뉴욕에서 열린 한국투자설명회도 마찬가지다. 바쁘기로 소문난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소방관처럼 직접 내달려 가야 했기 때문이다. 해외 투자자들의 한국에 대한 우려는 북핵과 관련한 노무현 대통령의 깊은 속내가 무엇인가 하는 미국의 의구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盧대통령의 말과 노선이 미국인들의 '코드'를 잘 헤아린 것이었다면 바쁜 金부총리까지 런던과 뉴욕에 날아갈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것일까. 외환위기 때는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서 투자유치를 외친 마당에 경제부총리의 런던.뉴욕행이 뭐가 문제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金부총리의 방문에 대해 고마워하기보다는 "얼마나 급했기에 부총리까지 오는가"라고 엉뚱한 방향으로 읽어버린다면 득보다 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국장이나 과장이 챙겨도 될 일을 장관들이 직접 나선다면 이에 길든 외국인들은 사소한 일을 들고도 장관만 만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디스의 경우는 과연 어떤가. 몇 명 되지도 않는 무디스 한국분석가들의 엄포 한마디에 한국 지도부가 일희일비하는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물론 국가 신용도가 국가 전체의 금융비용과 직결되는 마당에 무디스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쓰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정부 핵심들이 필요이상으로 과공비례(過恭非禮)하며 '무디스 공포'에 떠는 모습은 국민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기는 일이다.

盧대통령의 새롭고 다양한 업무 스타일도 장관들의 몸놀림 패턴을 바꿔놓는데 한몫 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그 중에서도 요즘 盧대통령이 벌이는 언론과의 시비는 사단장들을 보초 수준으로 내모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라는 평가다.

"일절 대응하지 않는다"는 '대(對)언론 전략'이야말로 신문기자들을 가장 맥빠지게 하는 묘수(?)라는 것을 노무현 대통령은 아직 전해듣지 못한 모양이다. 청와대가 사단장 보초 서듯 사소한 기사에까지 일일이 대응하려 들면 장관들은 설 땅을 잃고 피곤해진다.

대통령의 의연함과 인내 그리고 배짱이 장관들의 입지를 넓혀주고 또 그렇게 해야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돼 국가경영이 쉬워질 것이라는 지적은 그래서 큰 의미를 갖는다.

양봉진

*** 필자 약력 ▶서울대 임학과.경영대학원 졸업▶미 캔자스대 경영학박사▶현대증권 이사▶한국경제신문 경제부장.워싱턴 특파원▶한경닷컴 사장

*** 저서 '대통령님, 그냥 두시죠'(2001) '깨어나는 한국 죽어가는 일본'(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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