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정상인 듯, 정상 아닌, 정상 같은 비정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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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채 썬 오이에 얼음까지 동동 띄운 콩국수를 막 입에 넣으려는 순간, 남편 전화에서 ‘띵’ 소리가 난다. 문자가 왔단다. ‘최XX 사망. XY 장례식장.’ 최XX라면 40대 후반의 젊은 사람인데 갑자기 죽을 리는 없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나 해서 알아봤더니.

 이 불경기에 힘겹게 건설회사를 꾸려오던 그가, 얼마 전 낙찰과정에서 리베이트 줬던 것이 잘못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한다. 그러다가 어젯밤,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떴다는데. 우리 부부랑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난 그를 본 적도 없다. 단지 10년이 넘도록, 추석이면 어김없이 그가 보내주던 사과 박스만을 기억할 뿐이다. 문경까지 내려가서 직접 사과를 골라, 신세지거나 신세질 사람들에게 선물을 한다는 그 남자. 하지만 막상 그에게 큰 힘을 내려줄 분(?)들은, 맛있는 사과보다는 위험한 리베이트를 더 좋아했던 모양이다. 리베이트를 주고 싶지 않아도 힘 있는 상대편이 원할 때는 어쩔 수 없다더니, 최근에는 ‘이제 좀 살 만하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참 안타깝다.

 여성단체를 맡아 막 힘겹게 꾸려가던 시절. 미스코리아 대회가 열리는 이맘때면, 어김없이 우리 단체도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를 열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대회의 중요성도 부각시키고 유명세도 타야 했기에 사회 명사들을 초청했었다. 의전이 큰 문제였다. 유명한 분이면 유명한 만큼 대접해야 했고 그중 한 명에게라도 부실하게 대하면 초청하지 않은 것만 못했다. 그렇다 보니 행사 시작도 전에, 그들 소개하느라 30분 이상을 허비한 적도 많았다. 본 행사는 50분인데 인사 소개가 30분이라니.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 초청 손님들 명단을 슬라이드에 적어 무대나 화면에 넘기는 거다.

 그런데 슬라이드를 사용한 후부터, 자리를 빛내주려고(?) 오시는 분들의 수가 확 줄어버렸다. 난감했다. 그 후부터는 다시, 매번 행사 시작 전 30분은 소개시간으로 미리 비워놓았다. 아픈 기억이다.

 지루하고 비합리적인 초청 인사 소개방법. 그것은 관행인 건가, 다들 그렇게 한다니 이제는 그게 정상이 된 건가.

 잘못된 관행이나 제도 같은 것들. ‘을’ 입장에 있어보니 정말로 바꾸기 힘들더라. ‘갑’의 위치에 있어야만 당당하게 ‘내 소개한다고 시간 낭비 맙시다’ 혹은 ‘난 리베이트 안 받습니다’하고 보란 듯이 나설 수 있는 거다. 그나저나 이번 추석엔 그의 문경 사과가 무척이나 그리울 것 같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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