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게 그들의 왕국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58회 어린이날을 맞아 전국의 착한 어린이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이날은 어린이에게도 떳떳한 인권이 있음을 선언하는 날이며 나라와 가정의 모든 어른들이 그것을 성심껏 존중해야 함을 일깨우는 날이다.
어린이는 한 사람의 어엿한 인격이요, 가족 구성원이요, 국민이다. 그러나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과연 어린이에게 그만한 대우와 권리존중을 잘해주고 있는지 의문이다.
대도시의 일부 어린이들은 부모들의 지나친 보호 때문에 심신의 시달림을 받고 있다. 그런 과보호는 실은 어린이들을 위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볶는 것이라 해야 옳을 듯 하다.
또 일부 도시 어린이들은 부모들의 무관심과 바쁜 일과 때문에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탄광촌 어린이들은 그림을 그려도 새까만 꽃, 새까만 산만 그려낸다고 한다.
이런 온실 속에서만 자란 어린이, 벽 사이에서 저 혼자 자란 어린이, 그리고 새까만 석탄가루 속에서만 자란 어린이가 이 다음 커서 과연 어떤 정서를 드러낼지 궁금한 일이다.
그러나 어찌 그런 사례들뿐이겠는가. 산업사회의 모든 짜임새와 시설과 일상의 풍경들이 어린이에겐 너무나 힘겹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교통이 그렇고, 횡단로가 그렇고, 위락장이 그러하며, 콩나물교실·불량장난감·불량식품이 모두 그러하다.
심지어 요즘에는 어린이 「노이로제」와 어린이 암까지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니, 우리네 위생환경과 교육환경에 무엇이 잘못되어도 적잖이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
그 가슴 죄는 성적 올리기와 시험 치르기, 일등 따기, 반장 하기, 과외공부, 「피아노」 공부, 영어공부, 미술공부…등이 온통 어린이를 짓누르고 못살게 구는 것들뿐이니 어찌 그들이라고 「노이로제」엔들 안 걸리랴.
어린이는 어린이로서의 정신의 왕국(왕국)과 그들만의 자치령(자치령)이 있어야 꿋꿋하게 클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어린이 왕국을 아름답게 가꾸어주고 존중해주는 것이 바로 어른의 교육이요 사랑이란 것 일게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의 어린이들은 일찍부터 그런 왕국으로부터 추방되어 살벌한 어른의 식민지에서 처신하는 방법을 훈련받고 있다.
어른들은 그들에게 도요새의 노랫소리와 「팬지」꽃의 미소의 뜻을 잘 가르쳐주려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들이 길들여야할 냉혹한 생존경쟁의 체질에 썩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일까.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또 정의니 사랑이니 연대(연대)니 하는 것도 어떤 것인지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들을 자칫 잇속 없는 일에 몰두하게 만든다고 지정하기 때문일까.
그래서 어른들은 자나깨나 어린이들에게 무조건 공부 잘 하라고만 몰아세우고 그렇게 해야만 한 세상 큰소리치며 잘 살수 있다고 윽박지른다.
이 고된 맹훈련 속에서 어린이들은 머리만 쓰되, 심장은 없는 기형아로 굳어지도록 단련 받고 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어린이이기를 한시바삐 그만 두도록 강요받고있는 셈이다.
어린이날은 그래서 그 피로해진 어린이를 다시 어린이의 왕국으로 되돌려 보내야 함을 일깨우는 날이다.
그들에게 빼앗긴 꿈과 장난과 모험을 다시 즐기게 하고, 그들과 도요새 사이의 우정을 다시 살찌우게 해주자. 그리하여 하루만이라도 광장과 「빌딩」가의 저 살벌한 쇠붙이와 「콘크리트」벽에 그들의 해맑은 합창소리가 메아리치게 해주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