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쟁의의 경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이웃 일본에서 있었던 「미이께쟁의」가 생각난다. 20년 전 3월의 일이었다. 일본 「미쓰이」 (삼정) 재벌의 「미이께」 (삼지) 탄광에서 탄광 노조원들이 폭력 사태를 빚었다. 「미이께」탄광은 일본 최대 규모의 탄전이었다.
몇 달을 두고 계속된 소요 상황 속에서 살상자가 적지 않았다. 참가 연인원 30만명, 기업 적자1백억「엔」, 노조 지출 3O억「엔」-.
이런 쟁의의 뿌리는 으례 깊게 마련이다. 하루아침에 불만이 터진 것은 아니다.
1955년 일본 정부는 석탄광업합리화 임시조치법을 제정, 공포했다. 불량 탄광은 「스크랩」화(해체)하는 등 이를테면 탄광의 체질개선을 시도한 것이다.
탄광 회사들은 서둘러 장기 생산 계획을 세우고, 노무자들의 직장 확보를 약속했다. 그러나 무역자유화의 바람은 그런 약속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외국 석탄을 싼값으로 윤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운영난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은행들은 융자를 중단하는가 하면 탄광들은 자원 퇴직자를 모집했다.
이런 현실에서 「미이께」탄광은1천2백여명의 노무자에게 해고를 통고했다. 그 다음의 일들은 짐작 대로였다. 전 광부들이 「로크·아우트」(작업 중단)에 돌입했다.
그러나 노조 안에는 비판파가 있었다고 「로크·아우트」를 중지하고, 법정 투쟁을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 주장에 반대하는 「그룹」은 그들대로 삼지광산노조쇄신동맹을 만들었다.
이제부터는 노조 사이에 내정이 일어나 상잔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혼란과 혼란의 연속. 여기에 외부 세력까지도 가세했다.
때 마침 일본은 미·일 안보조약문제로 사회가 온통 혼돈에 휘말려 있었다.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사회불안이었다. 파탄의 지경에 이른 것 같았다.
이때 비로소 대화의 실마리는 풀리기 시작했다. 쟁의의 결말은 세 가지였다. 노조의 체제를 뜯어고치고, 사양 산업인 탄광 노무자들의 타 산업 전직을 보장하며, 생활권은 그것대로 달리 보장 해준다는 것이었다. 기업인도, 노무자도 한발씩 물러서서 공존과 화합의 원칙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경위는 다르지만 이번 강원도 사북 탄광의 경우도 타협과 공존의 「룰」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선 노무자는 기업인의 입장을, 기업인은 노무자의 처지를 서로 충분히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독선이나 파괴 행동은 어떤 미명으로도 어느 집단이나 어느 사회에서도 용납될 수 없다. 또 하나 우리의 문제가 있다면 관의 용렬한 사고방식이다. 매사를 음모와「밀어붙이는 식」으로 해결(?)하려는 사고에서 이젠 좀 벗어날 때가 되었다. 사북 소요 사태도 문제의 발단은 그런데 에서 비롯된 것 같다.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