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서 벌어진 「5분전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금화동북방5㎞지점 군사분계선을 통해 침투한 북괴3인조 무장공비소탕작전은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5분전쟁」이었다. 27일 새벽 야음을 틈타 군사분계선 남쪽 6백m지점에 잠입, 은거하면서 철조망 통과를 노리던 3명의 공비는 하오2시55분 아군수색대에 발각돼 5분동안의 총격전끝에 1명은 사살되고 2명은 북괴관측소의 엄호사격을 이용, 도주했다. 불을 뿜는 아군의 M-16에 퇴로를 찾지못한 공비들은 한때 AK소총과 수류탄으로 맞섰고 쌍방관측소는 기관총으로 서로를 엄호하면서 하오3시까지 5분동안 비무장지대는 잠시 전장이 됐다.

<은신>
지뢰탐지봉을 지팡이 삼아 27일 새벽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공비는 6·25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분계선남쪽 442고지 정상 7m쯤 아래 남향한 참호「비트」속에 숨어들었다. 이들이 은거했던 「비트」는 깊이 70㎝, 길이 1.5m, 폭1m로 갈색위장망을 덮고 나무잎을 위에다 꽂아 평지처럼 위장하고 있었다.

<조우>
정선기대위(28·3사8기·전남화순) 이종석소위(24·3사16기·대구) 박호민소위(23·3사16기·전북부안) 김윤길상병(24·경북상주) 한영근상병(23·강릉)등 11명으로 구성된 수색대는 27일 하오2시 저격능선남쪽 비무장지대안의 수색로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부대를 떠나 관측소를 거쳐 가파른 442고지 정상을 향해 수색대형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하오2시55분쯤 수색조 전방10m 참호속에서 갑자기 총탄이 날아왔다. 첫발에 김윤길상병이 쓰러졌다. 3∼4발의 수류탄이 거의 동시에 날아와 정대위가 어깨·허벅지등에 파편상을 입고 멈칫했다. 이 소위의 철모가 총탄에 벗겨져 나갔다.

<교전>
정신을 가다듬은 이 소위가 총성이 난 방향에서 아군대위계급장을 단 공비1명이 사격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면서 몸을 피했다. 수색조 양쪽에 위치해있던 3명씩의 엄호조가 산개, 공비들의 은거지를 포위해 들어갔다. 참호속에 은신해있던 아군중사계급장을 단 공비 1명이 튀어나와 아군진지 오른쪽으로 우회했다.
이때 무전병 한영근장병이 왼손에 무전기를 쥔채 엎드려 M-16을 발사했다.
한상병은 한손 사격으로 단발에 수색대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려는 공비의 오른쪽 옆구리를 명중시켰다. 순간 공비는 던지려던 수류탄이 터지면서 그 자리에서 폭사했다.
수색대가 정상을 점령, 달아난 공비를 추격하려고 하자 적은 빤히 보이는 2개의 관측소에서 기관총 엄호사격을 해왔다. 정상점령까지 걸린 시간은 5분.
수색대는 적방향 관측을 계속하면서 전과확인작업에 나서 사살한 공비1명의 시체를 확인하고 북괴 제AK소총을 비롯한 무기·장비등을 노획했다.
적관측소의 엄호사격에 맞서 아군의 2개 관측소도 엄호사격을 개시, 적퇴로 차단조와 수색대 증원부대를 출동시켜 전열을 재정비했다. 9명으로 구성된 증원조가 도주로를 따라 수색에 나선 것은 하오5시20분. 이들이 442고지 5부 능선까지 정찰해 들어가자 적은 관측소에서 다시 일제사격을 가해왔다. 이때 아군대위계급장을 단 공비1명이 증원조를 향해 사격을 가하고 피투성이가 된채 바위가 많은 짙은 갈대숲으로 도주했다.
그 자리에서 AK수총 1정과 탄창을 또 노획하고 7시20분 상황은 모두 끝났다.

<평가>
대대장은 『마지막까지 추격당한 공비는 도주하면서 총을 버린 것으로 봐 중상을 입은 것같다』고 말했다.
『아군병사가 희생된 것은 불리한 지형여건 때문이었다』는 박중령은 『그러나 비무장지대안에서 벌어진 기습전으로 이만한 전과를 올리기는 드문일』이라고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