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기각율 9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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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논어에 이런 얘기가 있다. 자공이 정치의 목표를 어디에 둬야하느냐고 묻자 공자는 『식과 병과 신의 세가지』라고 대답했다.
『그 세가지 중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뭣부터 해야겠습니까?』
『그건 병이어야겠지]
『나머지 두 개 중에서 하나를 또 버려야 한다면?』
『그건 식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을 잃게 된다면 그때엔 인간의 사회가 아니라 짐승의 사회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런 세상에서 살 보람이란 없지 않겠느냐.』
공자가 말한 식이란 경제를 말한다. 그리그 신이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 사람사이의 신의, 아울러 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뜻한다.
정부가 헛 공약을 일삼아 신용을 잃게 되면 정치가 어지러워진다. 또 법이 공정을 잃게 되면 사람들은 법을 넘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또 서로 지켜야 할 신의며 도리를 안 지키게 된다. 공자는 이런 것을 가장 염려했던 것이다.
사소한 일때문에도 정부의 공신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은 공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지난 한해동안에 검찰이 상고한 각종 형사사건 가운데 97%가 대법원에서 기각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이 저지르는 죄 가운데는 너무 법대로만 다스려서는 안되는 것도 많다. 그래서 기각된 것들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그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너무 우격다짐으로 법에 두들겨 맞추려다 탈이 난 것들이 그 태반이다.
일손도 모자라고 시문에는 쫓기고, 그래서 충분히 증거를 수집하지도 못하고 공소시효를 놓치는 수도 있다.
검찰쪽에도 이런 딱한 사정이야 많다.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으로, 그리고 또 대법원으로 오르기까지는 실로 여러 해가 걸린다.
그래서 그동안 무고한 피고들이 죄인 취급을 받아가며 수없이 끌려다녀야 한다. 소송비용도 엄청나게 든다.
아무리 무죄가 분명하다 하더라도 이런 부담을 모두 감당하지 못하면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중도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요행 대법원에까지 올라가서 무죄를 받는다 해도 그동안에 받은 엄청난 손해를 보상받을 길도 우리나라엔 없다.
상고기각율 97%라는 숫자에서 대법원의 고마움보다도 법을 원망하는 선량한 시민들의 한과 눈물이 돋보이는 게 뭣보다도 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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