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에 지명된 신현확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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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0월 26일 절박한 상황의 「심야국무회의」에서 박대통령의 사망사실을 확인하지 않고는 비상계엄 선포결의에 응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 사람이 신총리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그에게 돌아간 재상자리가 그때 운명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신총리는 일찍부터 명석한 사람이란 평을 들었지만 부총리에 취임하고 나서 소신과 용기로 성가를 더욱 높였다.
안정화시책이란 기치아래 모두들 손대기를 꺼렸던 물가현실화 조치를 단행하고 성역으로 돼있던 수출 「드라이브」 정책과 중화학 축소에도 과감히 손을 댔다. 한번 결심하면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황소 고집이 있다. 자신은 부총리직을 마지막 「서비스」라 생각하고 소신껏 일하겠다고 늘 강조해왔다.
경북 칠곡산으로 43년 경성제대 법문학부(현 서울대법대)를 졸업했으며 재학 중 일본 고문행정과를 합격했다. 한국인으로선 드물게 일본통산성에 근무하다 해방을 맞아 관계를 떠나 대구대학 창설「멤버」로 6·25때까지 교단에 서기도 했다.
54년 34세 때 상공부 전기국장으로 다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59년에는 부흥부장관으로 영전, 30대 장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4·19 후에는 관계를 떠나 동해전력사장·쌍용양회사장 등 민간기업 경영에 투신했다.
75년 보사부장관으로 입각했다.
부총리 취임 후 물가현실화·시장기능의 회복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민간기업을 경영해본 경험이 바탕이 됐다는 사실을 본인도 시인하고 있다.
앞으로 국정을 풀어 나가는데 그의 야인생활, 국회의원으로서의 경치경험 등이 귀중한 거름이 될 것이다.
부인 김혜배여사와 사이에 1남 3여가 있다. 취미는 바둑(3급)과 「골프」(핸디18).
부인 김여사는 국전특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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