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과 시련의 관문…신춘문예<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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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신춘문예는 30년대초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에만 있는 문단 「데뷔」의 한 방법이 아닙니까. 반세기동안 신춘문예가 한국문학 전반에 끼친 업적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김=신춘문예제도가 시작된 이후 50년 가까운기간동안 신춘문예를 통해「데뷔」한 문인은 전체 문인의 30%(문협조사) 에 이르고 있다고 해요. 양적으로도 풍성하지만 이들이 문단의 중심인물로 활발한 문학활동을 해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황=문학예술의 입장에서 봐도 정초의 경사스러운 날에 각 신문이 문학으로 장식된다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라 생각돼요. 사실 신춘문예는 문학과 대중을 서로 만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읍니다. 대중으로 하여금 문학에 끌리게 하는 욕망을 심어주었다는 데에도 의의가 있어요.
김=신춘문예에는 잡지추천제도처럼 정실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낮선 투고자와 낮선심사위원들이 작품을 통해서 첫대면을 하는 것 아닙니까.
신춘문예가 신선하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겠지요.
최=하지만 잡지추천제도가 한사람의 여러작품을 보고 숨겨진 재능을 평가할 수 있는 반면 신춘문예는 한 작품만 가지고 심사해야하는 어려움이 있긴 하지요.
김=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하고도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문인이 많지 못하다하는 일부 의견도 여기에 기인하지 않나 해요.
황=그러나 그것은 전혀 개인의 문체지 신춘문예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춘문예나 「데뷔」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강도가 달라진다고 볼 수 있지요.
최=혹 어떤 사람들은 시의경우 몇천대1, 소설의 경우 몇백대1의 경쟁을 거쳐야 하는 점을 들어 신춘문예 심사에 소홀한 점이 있지않나 의심을 하기도 하는데 몇차례 심사에 참여한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우입니다. 보내는 이의 정성만큼 심사과정에 종사하는 이들의 정성도 그만큼 신중하고 염격하다는 것을 믿어줘야 해요.
황=심사에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낯선사람끼리의 만남, 이런 뜻에서 신춘문예는 「비인간적인 냉혹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웃음) 그러나 투고자의 다수가 낙방한다해도 당선을 겨냥하며 골똘히 작품을 만드는 행위는 귀중한 작업이라고 생각됩니다.
김=신춘문예는 그 시대의 상황을 예민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소설의 경우 동란이 있었던 50년대엔 역사성이 강세를 보인 「직정적인 세계」였고, 60년대엔 사회성과 사상성이 강세를 보였읍니다.
그런가하면 70년대의 신인들은 다분히 형식에 집착한 「기교주의적 성향」이 뚜렷해졌지요.
황=연령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보이지 않았읍니까. 50, 60년대만 해도 20대 전반이 대다수였는데 70년대에 들어선 오히려 20대후반, 30대가 더 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어오. 이는 우리문단도 폭넓은 교양과 지식으로 다져지고, 충분한 창작과정을 거쳐 숙련되고 알찬작품을 지향해 가는 경향을 보여주는 바람직한 현상으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최=그런데 신춘문예가 한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작품의 유형화」인 것 같아요. 작품을 신춘문예에 맞는 어떤 틀에 끼워 맞추려는 생각. 선자나 응모자나 함께 생각해야할 문제입니다.
김=문제는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하려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를 갖고 창작에 임하느냐에 있는 것 같아요. 당선만을 목표로 하는 것보다는 문학에 대한 순수하고도 소박한 애정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최=또 하나는 작품에 신인다운 패기가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신인의 패기란 기성에 대한 도전을 뜻하지요. 맹목적인 도전이 아니라 이유있는 도전, 창조적인 도전이 있어야겠다는 뜻입니다.
황=순전히 당선만을 겨냥하여 기성작품의 어떤 유형을 쫓고, 기성인의 것을 무조건 수용하는 태도는 지양돼야 합니다. 그 수준에 도달하면 당선권이라는 입시준비적인 사고는 버려야겠지요.
김=결국 응모자들은 왜 무엇때문에 글을 써야만 하느냐하는 참된 철학이 없이 동기실정이 비문학적인 방향으로 변질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군요.

<정리=김준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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