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한·중 정상에 바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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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재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미·중 관계센터 소장

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심신지려’(心信之旅: 마음과 믿음을 쌓아가는 여정)를 성공적으로 마친 지 1년 만에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국빈 자격으로 오늘 한국을 답방한다. 1992년 수교 이후 22년간 양국 사이에 보이게 또 보이지 않게 차곡차곡 쌓여온 간칭(感情)과 관시(關係)를 감안할 때 시 주석이 북한보다 한국을 앞서 방문하는 것이 꼭 그리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더라도 순방이 아닌 한국 단독 방문이라는 점에 대해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공식 명칭을 다시 바꿔 한·중 관계를 ‘격상’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수도 없이 나왔지만 박 대통령의 방중 시 양국 간 합의했던 ‘내실화’의 기조가 향후 최소한 몇 년은 더 지속되기를 바란다. 1~2년 만에 양국 관계의 내실화가 완성되기도 어렵거니와 복잡다단해져 가는 양국 관계를 한두 개의 단어로 ‘이벤트화(化)’하려는 미숙한 발상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 말이 앞서는 외교는 실사구시를 중시해야 하는 한국의 몫이 아니며, ‘말은 적게 하고 행동으로 보여줌’(多做少說)을 강조하는 중국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중 관계의 내실화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 박 대통령, 시 주석에게 다음의 몇 가지를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의 기본 축들을 보다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우선 ‘경제 신목표’의 설정이 긴요한데 짧게는 2020년, 길게는 2025년까지 양국 간 경제협력의 새로운 지표 설정이 필요하다. 또 이미 적잖이 개설된 외교·안보 대화 기제와 더불어 인문·사회 영역의 진솔한 소통을 위해 여러 영역을 망라한 민관 합동의 ‘21세기 한·중 우호협력위원회’ 설치를 제안한다. 더불어 양국 간 인적 교류 확대 및 공감대 확장을 위한 장기적 플랜을 세워야 하며, 청소년 교류 확대를 위한 다면적 접근과 사증 면제의 광범위한 시행을 위한 준비가 절실하다.

 둘째,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의 내실화는 ‘보다 예측 가능한 관계’의 구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보다 예측 가능한 관계란 비교적 용이하고 실현 가능한 영역에서부터 불확실성을 점차 줄여가는 것을 의미한다. 양국 간에는 이와 관련해 통상 분규의 사전 예방, 조기 경보 및 상호조정 등과 함께 현재 동면(冬眠) 중인 ‘역사 문제’에 대한 비정치화(非政治化) 노력의 지속, 그리고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포함한 해상 경계선의 조기 확정 등이 있다. 쉽지 않은 일들이지만 진정한 전략적 협력동반자라면 - 특히, 두 정상의 결단 아래 -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다.

 셋째,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는 무엇보다도 상호 전략적 신뢰의 구축과 축적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기나긴 역사를 공유해온 한국인들은 중국에 대해 원천적 두려움을 갖고 있다. 최근 중앙일보와 아산정책연구원이 수행한 인식 조사에 따르면(본지 6월 27일자),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한·중 관계가 좋아졌다고 보는 한국인이 62%에 달한 반면, 중국의 군사적 팽창이 한국에 큰 위협이라고 인식하는 이들도 66%에 이르렀다. ‘전략적 겸허’를 지칭하는 ‘도광양회’(韜光養晦: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린다)의 시기가 끝나가는 지금,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인 한국에 중국은 과연 ‘가깝고 성의로 대하며, 도움을 주면서 또 포용하는(親誠惠容)’ 진정한 동반자로 남을 것인가?

 2008년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가 처음 선포되었을 때, 그리고 2013년 그 내실화가 결정되었을 때 양국은 그 의의를 ‘단순히 양자 영역만이 아닌 지역적, 글로벌 차원에서 협력을 도모하는 관계’로 정의했었다. 그러나 지난 6년을 돌이켜볼 때 어쩌면 이 부분이 ‘내실화’를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중국이 새로운 ‘천하’(天下: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 국제질서)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계(世界: 국가 간 형평과 호혜를 기반으로 하는 수평적 국제질서)를 추구한다는 전제하에 비전통안보 영역에서부터 북한 문제 및 동아시아 안보 기제의 구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긴밀한 협력을 모색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한·미·중, 한·중·일을 잇는 ‘소(小)다자연계’도 강화될 필요가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미국과 중국의 국력 교점을 일러야 2050년 정도로 보다가 최근에는 2025년까지 앞당기는 추세에 있다. 어쩌면 전 지구적 관점에서의 평가보다 그 시점이 훨씬 빨리 올 개연성이 높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섣불리 이웃들에게 ‘우리 편이 정말 맞아?’라고 캐묻는 우(愚)를 범하지 않길 시 주석에게 진심으로 바란다. 반면 하루하루의 현안에 매몰되기 쉬운 우리 외교당국이 ‘대증(對症) 외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감안한 전략적 대비를 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박 대통령의 몫이다.

정재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미·중 관계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