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불교근세 백년①강석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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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필자소개>조계종 총무원장 네 차례 역임한 원로스님
속명이 강계술인 석주스님은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출가, 서울 선학원에서 고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1928년 6월 부산 범어사에서 김남천 스님으로부터 득도하기까지는 한용운 선사의 시봉으로 많은 항일 애국지사들을 접하면서 뜨거운 민족혼을 일깨우기도 했다. 청정비구로 네 차례나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는 등 수행과 종단행정직을 두루 거친 선배이며, 학승이기도 하다. 현 조계종단의 대 원로인 석주스님은 범어사대교과를 나와 대덕법계를 품수한 후 경남 은하사·경주 불국사 주지, 선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 밖에도 조계종 고시위원, 동국역경원 부원장, 조계종 포교원장, 감찰원장 등의 종단요직을 거쳐 현재 칠보사주지로 있다.
한국불교의 근세 1백년에 걸친 이야기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나는 재삼 사절했다.
70평생을 평범한 승려로 살아왔을 뿐 나 자신이나 남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보다 정직하게 말하면 좋은 일, 궂은 일로 얼룩진 지난 1백년의 불교계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아직 실존해 있고, 타계한 인물의 후예들도 있어, 내 이야기로 인해 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다.
또 글을 써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야기가 정직하기는커녕 자칫 교언영색에 떨어질까 두렵다. 불교에서는 교언영색을 기어라고 해서 계율로 금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거절하다 못하여 이 글을 쓰기에 이르렀으니 내 어리석음을 스스로 탓할 뿐이다.
비가에서는 「개구인착」이라고 하는데 나의 착에 떨어진 입놀림으로 해서 누를 끼치게 된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1909년 3월 4일 경북 안동군 북후면 옹천리에서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아버지 대업과 어머니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 되는 해 봄 서울로 오기 전까지는 농촌의 어린이들이 그렇듯 꼴을 베고 소를 먹이며 약간의 한문을 배우면서 자랐다.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에 온 나는 가회동의 구촌 아저씨(강재규)댁에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아저씨는 사업을 하면서 고향의 젊은이들 5, 6명을 집에 하숙시키면서 학교에 보내는 학학 독지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학교에 다닐 복이 없었던지 불행하게도 아저씨의 사업실패로 학교를 포기해야 했다. 1년여를 아저씨 댁에서 기식하던 나는 이듬해 가을에 선학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김남천 스님 밑에서 행자가 되었다.
출가나 승려가 돼야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공부를 하기 위해 선학원으로 간 것이다. 이 때가 1923년 가을이었다.
선학원에서 20세 되는 해(l928년) 봄까지 나는 행자로 있었다. 행자란 본래 불도를 수행하는 사람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승려가 되기 위해서 수련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행자의 수련은 주로 초보적인 경전과 율전을 배우고 의식과 행·주·좌·와 등 승려생활의 법도를 익히는 한편 절의 잡다한 일상적 잡역까지를 해야 한다.
요즘과 같이 승려가 되겠다고 절에 찾아오기만 하면 아무런 사전의 수련을 거치지 않고 사미계를 받고 곧 이어서 비구계를 받는 것에 비하면 나의 5년 동안의 행자생활이란 격세지감이 있다. 오늘날 승려의 질적 타락을 지적 받는 사례가 잦은 것은 하루아침에 비구가 급조되는 대도 그 원인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꿈 많은 청소년 시절의 행자생활이란 참으로 쓰라린 시련의 생활이었다. 새벽 4시에 남 먼저일어나 밤 9시가 지나서야 잠자리에 드는 고된 일과 속에서도 한용운 스님이라든가 신간회 인사 등 지사들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좌절 속에서나마 새로운 희망을 갖게 했으며, 일제통치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민족혼을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
또 내가 승려가 되려고 선학원에 갔던 1920년대 초반은 3·1독립만세사건 직후이며, 한국불교를 왜색화 하려는 일단의 본산주지와 총독부에 대한 항거가 수행승과 청년승려들에 의해 보다 극렬했던 시기였던 만큼 나에게 준 한용운 스님을 비롯한 젊은 학승들의 영향은 향학열 면에서도 그렇지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도 매우 컸던 것이다.
당시의 청년승려들은 총독부의 사찰령으로 묶인 불교계의 혁신을 이룩함으로써 독립에 일조를 기하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투쟁했으나 총독부와 본산주지들에 의해 묵살 당하고 있었다.
그들이 1922넌 초 총독부의 방침에 순응하며 왜색화를 은연중 바라고 있는 본산주지들을 성토하고, 급기야 본산주지 중 1인인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 스님에게 북을 메게 하여 두들기며 종로를 걷게 한「명고축출」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그 저변에 항일과 불교혁신운동의 강한 욕구가 깔려 있었다.
그로부터 1945년까지, 그리고 그 뒤 비구승에 의한 불교정화운동에 이르는 시기, 즉 내가 앞으로 이야기할 시기의 불교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훨씬 그 이전에 있었던, 왜승 좌야전려가 우리 조정에 간하여 승려의 서울 출입이 해금된 고종 32년(1895년)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 개화기에 있었던 한일 불교 관계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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