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개혁·범 기독교 운동에 앞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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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거한 교황「바오로」6세는 너무나 느리게 혹은 너무나 빠르게 진척되고 있다는 이유로 흔히 비난을 받았던 말썽 많던 15년간의「가톨릭」개혁기 중 7억의 세계「가톨릭」 신도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숭배돼 왔다.
「바오로」6세(본명「조반니·바티스타·몬티니」)는 산아제한에 대한 그의 반대와「가톨릭」성직자들의 독신생활의 고집을 둘러싼 극적인 분쟁들로 그의 재직기간을 채웠다. 이들 두 쟁점들을 둘러싸고 교황의 권위에 가해진 광범위한 도전은 그의 눈물을 자아낼 때도 있었다고 「바오로」6세는 생전에 밝힌 바 있다.
「바오로」6세는 또 만년에는 낙태 반대를 거듭 천명했다. 교황은 이밖에「마르셀·레페브르」「프랑스」대주교 등「로마·가톨릭」내 보수파 고위성직자들로부터 교황청과의 결별 위협을 받기도 했다.
「바오로」6세는 또 전통적인「가톨릭」교의 병폐를 과감하게 쇄신하고 희랍정교 영국교회와의 대화를 통한 범 기독교 운동에 앞장서는 등 20세기「가톨릭」교의 면목을 일신시킨 개혁가로, 그리고 자주시대의 평화의 사도로 5대양 6대주를 누빈『순례자 교황』으로서 역사에 거대한 자취를 남겼다.
그는「베트남」과 중동 및 그 밖의 세계분쟁의 해소를 위해 교황직을 십분 활용했으며, 「로마·가톨릭」과 동구 공산권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진력했다.
그는 성도「예루살렘」의 국제적 지위를 촉구했으며, 난무하는 폭력과「포르노」및 『인간의 정신적 몰락』을 경고하는 발언을 거듭했다.
폭력에 극력 반대해온「바오로」교황 자신도 l970년 11월「아시아」여행도중 필리핀」의「마닐라」공항에 도착한 후「볼리비아」의 한 화가로부터「나이프」공격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화를 면했는데, 이 사건은 지난 5세기동안 교황에게 가해진 최초의 암살기도였다.
「바오로」6세는 1897년「이탈리아」북부「알프스」산록「포」강유역 지방인「톰바르디」의「브레샤」주「콘체시오」읍에서 완강한 반「파쇼」주의자이며, 법률가 및 언론인「조르지오·몬티니」의 두번째 아들로 탄생해서 1920년 신부로 서품 되었다. <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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