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南北 사이의 경계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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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달 22일 평양 순안공항. 독일 뮌스터대 송두율(60.사진) 교수가 남측 학자들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렸다. 일행을 맞는 북측 인사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이라크 전쟁 탓으로 보였다.

송교수의 조율이 없었더라면 26~27일 '평화와 통일'이라는 주제로 열린 '남북,해외학자 통일회의'는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회의 두 시간 전까지 개최 여부가 불투명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짬짬이 시간을 내는 방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송두율 교수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의 이념적 성향 때문에 지난해에도 한 학술행사에 참석키로 했으나 끝내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송교수는 스스로를 '경계인'이라 부른다.

그는 기자에게 여러차례 "남북 측 이견을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없었다. 이견과 갈등을 나의 내면 속에 타자로 받아들여 화해시키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는 남북의 벽을 넘어서는 새로운 통합을 그려내려 고뇌하는 송교수 특유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경계인'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비관적이 아닌가.

"뉘앙스가 부평초(浮萍草) 같기 때문인가. 그것은 결코 비관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니다. 남북을 배제하면서 동시에 통합하는 '제3'을 찾는 창조인으로의 경계인으로 봐 달라. 이번 '남북, 해외학자 통일회의'에서 '배제하고 동시에 통합하는 제3'으로서의 '경계인' 의미와 역할이 주효했다는 생각이다."

-경계인으로서 바라보는 지금 한국 사회는 어떤가.

"경계인의 양쪽에는 분단된 남과 북이 있다. 남쪽은 밖의 세계와 같은 속도를 맞추기 위해 '동시성'을, 북쪽은 '주체'라는 '비동시성'을 늘 강조하면서 반세기 넘게 서로 다른 삶의 세계를 구축해 왔다. 이 두 세계가 만나 공생.공영하기 위해선 '동시성과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새 개념이 필요하다. 이젠 내 속도에 상대방이 따라줄 것을 요구할 게 아니라 상대방의 속도에 자기의 속도를 맞추는 반성이 필요하다."

-최근 출범한 참여정부에 대한 견해는.

"새 정부는 이라크 전쟁, 북핵 긴장 등 어려운 국제환경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진보가 폭력에서 평화, 갈등에서 화합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필요는 없다. 그간 남한은 시민사회의 성장을 통해 냉전시대의 폭력적 질곡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 더 긍정적이다. 이라크 전쟁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국제정치는 재편의 격동에 휘말릴 것이다. 그러나 남북이 역량을 극대화하면서 유동적 질서 재편에 적극 참여한다면 중요한 세계사적 의미를 갖게될 지 모른다. 남쪽의 상황 변화로 나의 귀국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기대도 해본다."

-송교수의 귀국 문제를 놓고 한국 지식사회 전체가 논란에 빠지기도 했다.

"준법서약서 제출에 거부하는 내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한국의 지식계는 그런 '기능적' 상황 논리에 너무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귀국 그 자체보다 어떻게 귀국하느냐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왔다. 한국 사회는 이제 구시대적 관습, 악법과 제도를 혁파하느냐 아니면 그것에 실패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현재 유럽에서 새롭게 등장한 지식인의 화두가 있는가.

"9.11 테러 이후 미국과 유럽 지성 간에는 비대칭적 관계가 성립됐다. '세계는 좁아졌는데 반대로 미국은 너무 커졌다'라는 말은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유럽 지성인들의 현실 참여 모습에서 나는 그들의 고민을 보게 된다. 진리가 힘에 의하여 만들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다. 그러나 이같은 격랑 속에서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더욱 발현시켜야 한다는 게 오늘날의 문명사적 요청이다. 미국의 일방주의적 패권은 이런 문명사적 흐름에 위협적 요소라는 생각이다."

-최근 '현대성의 명암(Schattierung der Moderne,독일 파피로사刊)'을 출간했다. 어떤 내용인지.

"동서양의 '경계인'으로서 철학.사회학.정치경제학.종교.예술 등의 현대성을 재음미하고 비판했다. 결론에서도 적고 있는 것처럼 어두운 밤에는 꽃의 색깔을 구별할 수 없다. 빛이 있어야 꽃은 다양한 색깔들을 뿜어낸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오직 '통합하는 구별'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현대성의 과제를 발견할 수 있다."

평양=김창호 학술전문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 송두율 교수는

송두율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67년에 독일로 유학, 하이델베르크대학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사회학.경제사를 연구했다.

그는 74년 재독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초대 의장을 맡는 등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 친북한 인사로 분류돼 한국에 돌아올 길이 막혔다.

91년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북한을 처음 방문한 송교수는 그후 여러 차례 북한을 찾았으며 93년에 국적을 독일로 바꿨다.

저서로는 '역사는 끝났는가'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21세기와의 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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