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긴축 부른 로고프 논문, 무명 대학원생에게 일격 당해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케네스 로고프

피케티의 책 『21세기 자본론』을 둘러싼 논쟁은 지난해 ‘로고프 절벽’을 놓고 보수파와 진보파가 벌인 설전의 판박이다. 다만 공수만 바뀌었을 뿐이다. 재정위기로 벼랑 끝에 몰린 그리스를 구제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유럽연합(EU)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한창이었던 2010년 4월. 하버드대 경제학자 케네스 로고프와 카르멘 라인하트 교수가 ‘부채시대의 성장’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40여 개국의 200년에 걸친 방대한 통계를 분석한 논문의 결론은 단순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이 90%가 넘는 국가의 경제성장률이 평균 -0.1%로 나왔다는 것이었다. 나랏빚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성장이 뒷걸음친다는 얘기다. 이른바 ‘로고프-라인하트 절벽’이다.

논문은 엄청난 파장을 불렀다. 그리스·포르투갈·스페인 등 재정위기 국가는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뼈를 깎는 긴축과 구조조정을 울며 겨자 먹기로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3년 뒤인 2013년 3월 대반전이 일어났다. 미국 매사추세츠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로버트 헌든이란 학생이 수업에 낼 리포트를 작성하다 로고프 논문에서 세 가지 결정적 오류를 발견했다. 첫째는 GDP 대비 부채비율이 90%가 넘었는데도 경제성장률이 플러스였던 4개국의 데이터가 누락됐다. 둘째는 잘못된 가중치 적용이었다. 19년 동안 부채비율이 90%가 넘었던 영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2.4%였고 겨우 1년 부채비율이 90%가 넘은 뉴질랜드의 성장률은 -7.6%였는데 이 두 나라 통계를 같은 가중치로 단순 평균했다. 셋째는 자료 처리를 위해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엑셀을 쓰면서 실수로 통계 일부를 누락했다. 그런데 누락된 통계가 하필 부채비율 90%가 넘으면서도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국가였다.

헌든은 이 같은 사실을 지도교수인 로버트 폴린에게 알렸고 이들은 ‘과다한 공공부채가 성장을 지속적으로 가로막는가?’라는 반박 논문을 냈다. 로고프의 오류를 모두 수정한 뒤 다시 계산해봤더니 부채비율 90%가 넘는 국가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0.1%가 아니라 2.2%로 나왔다는 것이다. 빚이 많으면 성장이 뒷걸음친다는 ‘로고프-라인하트 절벽’ 가설이 뿌리째 흔들린 셈이다. 경제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하버드대의 거물 경제학자가 대학원생에게 일격을 얻어맞은 꼴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자 로고프는 “비록 부채비율 90% 이상 국가의 성장률이 마이너스는 아니더라도 부채비율이 낮은 국가에 비해선 1%포인트 이상 낮다”며 ‘과도한 나랏빚이 성장의 걸림돌’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로고프가 사과하지 않자 이번엔 대표적인 진보학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나섰다. 심지어 크루그먼은 뉴욕타임스(NYT) 칼럼을 통해 “(로고프 주장이) 학술적 포장을 하고 있지만 상위 1% 부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부채비율 90%라는 기준 자체가 자의적인 것”이라며 “로고프 절벽은 없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설전은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의 자존심 대결로 비화하기도 했다. 논쟁이 절정에 달할 무렵 진보학자 매사추세츠대 아린드라지트 듀브 교수는 로고프의 주장에 결정타를 날리는 논문을 추가했다. 경제 위기를 겪은 국가의 통계를 살펴보니 정부 빚은 저성장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얘기다. 정부 빚이 늘어나 성장이 정체된 게 아니라 성장이 정체되면서 실업 급여나 사회보장비 지출이 증가해 정부 빚이 불었다는 것이다. 경기 침체기에 정부의 적극적인 경기 부양이 악이 아니라 선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 다시 득세하면서 미국과 유럽 중앙은행은 대대적인 양적완화(QE)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정경민 기자 jkmoo@joongang.co.kr

오피니언리더의 일요신문 중앙SUNDAY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패드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탭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앱스토어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마켓 바로가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