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2) 프로야구 창립계획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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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여기서 내가 한국프로야구의 청사진이 된 창립계획서를 만들게 된 동기를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나와 서울상대 동창인 이호헌씨는 1979년 대한야구협회 통합작업 때부터 야구행정에 몸담았다. 내가 야구협회 전무였을 당시 이호헌씨는 사무국장이었다.

1981년 8월, 이호헌씨가 내게 "프로야구 창설을 계획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안을 만들어달라"고 제의를 했다.

그는 당시 MBC 야구해설을 맡고 있었는데 MBC와 정부측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프로야구 창설작업 의뢰를 받았다고 했다. MBC는 5월께 창사 20주년 기념사업으로 독립기념관 사업과 프로야구팀 창단을 기획했다.

그리고 청와대는 7월께 이상주 교육문화수석의 주도로 프로야구와 프로축구의 출범을 타진하고 있었다. 이때 마산 출신 우병규 정무제1수석은 동향 출신의 야구인 이호헌씨를 이상주 교육문화수석에게 소개했고, 이호헌씨가 다시 내게 창립계획서 작성을 부탁함으로써 내가 그 업무를 맡게 된 것이었다.

나는 아마추어 야구에서의 경험과 해외 사례를 면밀히 연구해서 한국프로야구 육성 9개년 계획 및 운영기구조직, 구단 선정에서부터 선수 및 감독의 급여, 경기일정에 이르는 모든 분야를 망라한 계획서를 만들었다.

이 계획서를 만드는 데에는 1981년 흥행에 대성공을 거둔 '한국야구 대제전'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또 80년 가을 상업은행 야구선수 김준환(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이 나를 찾아와 털어놨던 고충도 참고가 됐다.

"회장님, 실업야구 큰 일 났습니다. 선수들이 점점 야구를 하려들지 않습니다."

군산상고 출신의 김준환은 내가 전북야구협회장을 맡은 경력이 있어서인지 나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며 무척 따랐다. 그런데 80년 가을 나를 찾아온 김준환은 대뜸 불평부터 토로하는 게 아닌가. 당시 실업야구는 조금씩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지만 선수들이 생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게 자세한 이유를 물었다.

"지난 여름 백호기대회에서 우승했는데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승급이나 보너스는 전혀 없고 용돈 5만원이 전부예요."

김준환은 입이 불쑥 나와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는 실업팀이 정상에 오르면 두둑한 보너스를 주거나 호봉을 승격시켜 주곤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불어닥친 경영합리화 바람에 따라 운동부에 대한 지원이 대폭 줄었다.

그래서 금융단 선수들은 운동보다 사무직 전환을 원하고 있었다. 나는 김준환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며 우리나라 야구도 프로화를 할 때가 됐다고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런 참에 계획서 작성을 의뢰받고 보니 성인야구를 직업화할 경우 선수들에게 어느 정도 대우를 해줘야 할 지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화장품에서 뛰고 있던 김봉연(전 해태코치)을 따로 만났다.

김봉연은 당시 실업야구 정상급 선수로서 월급이 30만원이었다. 연봉으로 따지면 3백60만원. 여기에 대회 때마다 약간의 보너스를 합해서 연간 4백80만원 정도를 받고 있었다. 나는 '적어도 프로야구 선수라면 실업야구에서 받는 10년치를 1년에 벌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봉연 같은 특급선수에게는 계약금 2천만원, 연봉 2천4백만원은 줘야한다고 계획서를 만들었다. 그 금액이면 당시 서울 강남의 30평대 아파트 한채를 살 수 있었다.

이용일(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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