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도류중인(쓰루·시게도 일교대학 교수)가 내린 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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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일본은 남의 시장엔 악착스럽게 파고들어 갔으나 일본시장은 인색할 정도로 늦게 개방했다. 자본자유화나 무역자유화나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자유화를 추진한다는 것이 일본정부의 정책목표였지만 다른 나라에서 보면 항상 늦었다. 일본이 IMF(국제통화기금) 등으로부터 자유화의 압력을 받은 것은 60년대 초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국내산업보호를 이유로 계속 버티다 64년에 가서야 겨우 자유화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일본은 63년에 「가트」규약11조를, 64년에 IMF협정8조를 받아들였다. 「가트」규약 11조와 IMF협정8조의 수락은 외화 및 무역제한의 철폐를 뜻한다. 일본은 60년부터 자유화의 준비를 했다. 만약 자유화를 단행할 경우 국제경쟁상의 불이익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자유화해도 지장이 없는 품목들만 신중히 골랐다. 자유화의 비율을 60년의 41%에서 차차 높여 64년엔 93%까지 올렸다.
일본은 이미 64년까지 값싼 노동력을 배경으로 기술진보 등에 의해 다른 선진국과 거의 대등한 경쟁을 벌일 정도가 되었다.
국제경쟁력이 있다는 확신을 가진 후에야 일본은 무역제한을 철폐한 것이다. 그러나 IMF 8조의 예외규정을 이용하여 몇 가지 품목은 계속 보호의 장벽 안에 두었다. 65년10월엔 완성승용차의 수입을 자유화했다.
일본은 명목적으로 무역제한조처를 풀었지만 관세율을 높은 수준에서 유지, 국내산업보호의 목적을 달성했다. 일본이 승용차에 대해 수입관세율을 10%이하로 떨어뜨린 것은 70년대 중반에 들어서였다. 60년대 후반엔 무역자유화와 계속적인 관세율의 인하가 혹시 국내산업을 압박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크게 일어나 자유화의 「스케줄」을 잠깐 중단하기로 했다.
자본자유화에 있어서도 무척 신중했다. 직접투자의 형식에 의한 외자유입이 국내유치산업에의 타격이 되지 않도록「타이밍」을 조정했다. 자본자유화에 대한 압력이 무척 거세였으나 계속 완강히 버텼다.
64년4윌 일본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함으로써 자본자유화의 의무를 지고 나서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외자의 시장침투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일본통산성은 국내산업에 대한 본능적인 보호의식을 가졌다. 벌써 60년대 초기에 「유럽」에 전문조사단을 파견, 「유럽」의 각 산업에 미국자본이 어떻게 침투하고 있는가를 세밀히 조사. 연구했다. 이 조사를 토대로 미국자본의 일본침투에 대한 대책을 준비했다.
또 기존기업에 대한 외국자본의 참여는 엄격히 통제되었다. 일본기업은 구조적으로 타인자본의. 비율이 높고 자기자본이 적기 때문에 적은 주식으로도 대기업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인의 기업진출은 신설에 한하도록 엄격히 봉사했다.
또 신설법인에 대한 출자비율도 국내인과 50대50으로 하도록 유도했다.
50%의 자본참여를 허용하는 것도 한꺼번에 확 트는 것이 아니라 몇 차례의 단계를 거쳐 하나씩 풀었다.
일본은 자본과 무역자유화를 추진하는 일방 국내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여러 정책을 주도했다. 즉 산업재편성이란 이름아래 국내기업의 합병·대형화를 서두른 것이다.
외국의 대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선 국내기업의 합간·대리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야하다」제철과 「후지」제철이 신 일본제철로 합병된 것도 일본 통산성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색한 자유화정책은 70년대에 들어 한계에 부닥쳤다. 높아 가는 대일 압력 때문에 73년엔 외자유입의 완전자유화를 원칙적으로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동차·전자계산기 등에 외국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일본기업들도 충분한 저력을 갖춘 뒤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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