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의교육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먼지 앉고 녹슬게 된 충효의 사상을 교육의 기조로 되찾아야겠다는 논의가 새삼 제기되고 있다. 일찍부터 도의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우리로서는 이 계제에 현대인의 덕목으로서 재정립해야 할 충효개념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해 둘 필요를 느낀다.
말할 것도 없이 충효의 개념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유교적 전통을 이어온 동양 3국, 즉 한·중·일 세나라 국민들의 일상을 율 하던 생활규범이자 또 그 공통적 가치관의 핵심이었다. 인·의·예·지·신의 인격적 완성을 지상목표로 가르친 유교가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충·효·제를 내세워, 그 중에서도 특히 효를 백 행의 본으로「클로즈업」시켜 마침내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정치철학체계를 갖춘 것은 논리적 필연이자 동시에 그 당시 동양사회의 가부장적 질서유지를 위한 정치 현실적 요청이기도 했던 것이다.
비단 충효의 개념뿐만 아니라 유교가 가르치는 제 덕목은 따라서 그것이 전기한 바와 같은 봉건사회의 정치 현실적 요청이었다는 사실을 사상하면, 개인윤리로서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을 가진 것이라 하겠다. 인격적 개성이 통틀어 망실돼 가고 있는 현대적 정신상황아래서 한국교육이 새삼 이 같은 인본주의적 덕목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그것을 도의교육의 기조로 되찾겠다는 것은 그러므로 어느 의미에선 시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현대사회가 복잡할수록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 인자하고 의로우며, 예의 바르고, 지성을 계발하고, 신의를 지킬 줄 아는 성품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그리고 또 한편 인간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양식인 가정과 지성사회 안에서의 대인관계에 있어 자애·화친·우애·공경·관용·상부상조하는 미풍이 어찌 낡은 것으로 배척받아야 만 할 것인가.
오늘날 불효하는 자식이 그 부모들에게 누가 낳아 달라고 해서 나를 낳았느냐고 대들면서 도리어 자식에 대한 양육의 의무의 부실함을 탓하는 것은 현대 사회적인 도덕률로 보아서도 패륜행위임을 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속하는 가정이나 지역사회 또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봉사는 외면한 채 권리만을 앞세우려는 경향도 또한 인류사회공통의 도덕률에 대한 배반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 사회가 잘못 인식한 외래사조아래 충효를 비롯한 모든 전통적 가치들을 오직 전근대적이며 반시대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려는「무드」에 젖게 된 것은 어찌된 셈인가.
충효의 사상을 한국 교육의 기조로 되찾아 하겠다는 주장은 그러므로 극히 당연한 윤리적 요청이지만 그럴수록 우리가운데 이 같은 오해가 생기게 된 연유를 살펴보고 그러한 오해의 제거를 위한 이론적 정초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으로 안다.
충효개념에 얽힌 근본적인 오해는 무엇보다도 그것이「지배자의 윤리」「강자만을 위한 도덕」으로 인식 될 소지를 가진 점이라 하겠다.
「충군애국」이란 미명아래 사리의 분간이나, 대의명분도 가릴 틈 없이 앞다투어 자폭의 길을 택했던 수십만「구 일본특공대원」들의 행동을 보면서 우리는 어찌 그것을「충절」의 귀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또 한편 어버이들의「에고이즘」때문에 정상적인 신심발달을 저해 당하고 있는 수백만 어린이들의 희생을 보면서 우리나라 형법전이 존속에 대한 학대·폭행 등을 친권자의 자식에 대한 그것보다 2배 이상의 형량으로 다스리게 했던 법원을 어찌 문제시하지 않아도 되겠는가.
발전하는 국가, 특히 정신적으로 새로운 변경을 개척하려는 국가에 있어서는 고「케네디」미국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국가가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주기를 요구하는 대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국민적 기풍이 충만 돼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에도 그러한 기풍은 올바른 충효를 가르치고 그것을 생활화하는데서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럴수록 이제 그 충효의 개념에는 현대적 윤리관으로서의 타당근거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 철학자「제임즈·로이스」가「코즈」(Cauwe 즉 대의명분)와의 이론적 결부를 통해서 충의사상의 도덕적·종교적 의의를 정립했던 것은 이런 관점에서 우리도 깊이 음미해 볼만한 일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