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춤문화 씨 뿌리고 무용평론의 새 지평 개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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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호 06면

우리 문화계의 큰 산이 무너졌다. 무용계 대표지성이자 원로평론가이신 조동화(趙東華) 선생의 24일 오전 작고 소식(향년 92세)을 접하고 든 생각이다. 한마디로 믿기지 않는다. 며칠 전 한성준 탄생 140주년 기념 행사를 의논하기 위해 긴 시간 동안 통화를 했기 때문이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몇 가지 주문을 잊지 않으셨다. 일회성 행사로 끝낼 것이 아니라 역사의식과 문화적 관점에서 접근할 것, 기록을 남길 것, 그리고 무용계 화합과 포용을 강조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무용계 정신적 지주 조동화 선생을 보내며

조동화 선생과의 인연은 내 인생의 행운이자 커다란 축복이다. 1998년 문화부에서 ‘이달의 문화인물’로 근대 전통춤의 거장 한성준을 지정한 바 있다. 당시 한성준을 조명하는 학술세미나에 참가했고 한성준 관련 논문 덕분에 나는 조 선생께 필력을 인정받아 무용평론가로 등단하는 행운을 누렸다. ‘무임승차’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무용평론가 등단 이후 동숭동 10평 남짓한 ‘춤’지 편집실은 교양과 정신을 키우는 소중한 터전이 됐다. 조 선생의 발의로 ‘무용가를 생각하는 밤’을 기획해 사라져간 무용가들을 발굴, 조명했다. 그가 평생 모은 수십만 점에 달하는 무용자료 기증을 통해 춤자료관 연낙재(硏駱齋)를 개관한 것도 큰 보람이다.

선생은 무용계 대표지성이자 전문 무용평론시대를 주도한 분이다. 1922년 함북 회령에서 출생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문예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10대 초반 ‘소년 조선일보’에 습작시가 뽑혀 회령의 시골마을을 떠들썩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서울대 약대 시절 신문 모집광고를 보고 함귀봉이 운영하는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 입소할 정도로 호기심 많은 젊은이였다. 기자로 활동하면서 1960년대 초반 ‘무용평론가’라는 타이틀로 신문에 처음 무용평론을 시작했으며 동아무용콩쿠르 창설에도 산파 역할을 했다.

76년 창간한 월간 ‘춤’지는 한국 무용사에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다. ‘춤’지를 통해 미래 유망주들이 발굴됐고, 무용계 스타로 성장했다. 신무용이 퇴조하고 한국 창작춤이 안착하는 데 중요한 터전이 됐다.

춤비평의 산실로서 전문 무용평론시대를 견인한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일제강점기 독서인의 호사가적 취미에서 비롯된 무용평론은 ‘춤’지 창간과 더불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춤’지 출신 평론가들로 한국춤평론가회를 결성해 한국춤평단을 조성하고 춤의 지성화와 사회적 위상 강화에 헌신한 점도 기억할 점이다.

문화적으로 척박한 한국의 예술환경에서 출판상업주의와 결탁 없이 38년간 한 번도 결호 없이 발간되는 ‘춤’지의 존재는 세계 출판사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로 꼽힌다. 한국출판문화대상·중앙문화대상의 수상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평생 춤문화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온 조동화 선생의 공로에 대한 징표다.

창간 초창기 소장하고 있던 그림이나 도자기 등 골동품을 팔아 ‘춤’지 제작비로 충당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는 척박한 춤사회에 환한 등불이요, 정신적 지주와 같은 분이셨다. 자기희생에 철저했던 선생은 자기를 과시하는 데에는 언제나 미숙했다. 늘 초연한 위치에서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견지했다. 선생이 뿌린 춤문화의 씨앗을 가꾸어 열매를 맺는 것, 이젠 우리 후학들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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