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의 탈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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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결국 등소평은 쫓겨났다. 아무리 중국 땅이 넓다해도 주은내 만한『부도옹』은 흔치 않았는가 보다.
등의 실각은 꼭 l0년 전에도 있었다. 이때 당의 서기장으로 있던 그는 문화혁명의 태풍을 맞아 유소기와 함께 완전히 행방불명이 되었었다.
그렇던 그가 2년 전에 부수상으로「컴백」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지난 1월초에 주은내가 쓰러진 직후에는 수상 자리에 오르리라는 관측조차 파다했었다.
그러나 사실은「키신저」도 이미 지난 11월에 등소평은 불원 물러나리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뭣보다도 모택동이 그를 철저하게 불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72년 가을에 등소평이「컴백」된 것도 주은내가 암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조직력이나 탁월한 행정능력만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모가 후계자로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강청과도 가까운 왕홍문이나「키신저」가 점치고 있다는 장춘교 등이 모의 의중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작년 5월, 항주에서 일어난 노동파업 때 왕은 이를 슬기롭게 진압하는데 실패하여 정치적 역량의 미숙성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지난 5일에 일어난 천안문광장사건도 이념이 앞서고 실무에는 어두운 문혁파에 대한 불만이 터진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이날의 사건은 매우 자연발생적이었다. 주은내를 추도하는 화환들이 하룻밤 새 철거되어 이에 분격한 군중이 광장에 모여 난투를 벌인 것이다.
중공에서는 소의 인민기념비의 화환들은 청명절을 기해서 철거하도록 되어있다. 주은내의 것이라 해서 예외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중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단 하루 사이에 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왔다는 것도 심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을 주 한 개인에 대한 대중의 추도심의 발용라고만 보는 것도 너무 단순한 관측이다. 등소평이 그토록 구박받아 오면서도 지금까지 버릴 수 있었던 까닭은 이런데에도 도사려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앉아서 횡재한 것은 화국봉 한 사람이다. 그가 주은내의 뒤를 이어 중공건국 이후 26년만에 두 번째 수상이 되리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무명의 인물이다. 그의 정치역량도 제대로 시험대에 올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렇던 그를 모가 전격적으로 승격시킨 것은 그만큼 문혁파와 반문혁파의 대립이 심각하다는 예증 같기도 하다.
결국 모택동의 단으로 사태는 잠시 가라앉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휴전상태일 뿐이라고 봐야 옳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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