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망각된 도로 점유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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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30년 동안 내 땅인 줄만 알고 안심하고 집을 짓고 살았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그 일부가 나라 땅이라 해서 그 동안 안내 던 도로 점유료와 과태료를 한꺼번에 물게 됐다면 그것이 과연 시민만의 잘못일까.
설사 주민 쪽에 잘못이 있었다하더라도 30년이란 긴 세월동안 그런 「잘못」이 조금도 문제되지 않았던 까닭은, 시민이 까맣게 모르고 있던 사실을 시 당국 역시 깨우쳐 주질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시 당국 자신도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탓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작일자 본지의 보도에 의하면 서울의 적잖은 시민들이 난데없이 구청장 명의로 된 무단 점유한 도로 부지의 점용료 3만원∼25만원을 기한 안에 납부하라는 고지서와 함께 그렇지 않으면 가옥을 강제 철거하겠다는 통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문제의 시민들은 물룐 그 땅이 시유의 도로 부지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처음 집을 질 때도 말이 없었고, 살아오는 동안에도 당국으로부터 사용료를 납부하라는 고지서 한 장 받아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 느닷없이 수만원 또는 수십만원을 한꺼번에 내지 않으면 집을 헐어버리겠다니, 그 많은 목돈을 당장 어디서 마련하겠느냐는 푸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청천 벽력같은 행정 처분은 비단 서울시 당국의 이번 처사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하겠다.
관청의 이 같은 행정 조치는 물론 법적으로는 잘못이 없는 당연한 행정 처분이라 할지 모른다.
국공 유지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측량을 다시 하여 정확한 지적도를 새로 만들었고, 거기에 근거해서 무단 점유돼 온 시유지에 대해 응분의 사용료를 부과한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적법하다. 시정의 근대화와 정밀화란 요청에서 본다면 오히려 때늦은 감마저 든다.
그러나 법과 행정의 집행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30년의 망각」 책임을 반드시 시민에게만 물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시민이란 본래 공공 문제에 대해 정확한 정보와 자료를 갖기 어려운 처지에 있다. 때문에 시정과 시민의 공공 생활에 관한 정확한 정보와 규칙들을 수집·보관하여 이를 공중에게 충분히 주지시키고, 그 준수에 착오가 없도록 다짐하는 일은 불가불 당국의 행정력에 맡겨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당국의 이러한 행정적 노력이 충분히 경주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시민의 의무 이행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비로소 시민의 방심이나 탈법이 문책되어야할 것이다.
이번의 도로 점유료 징수를 두고 본다면 시 당국은 애초에 왜 시유지가 개인에 의해 부단히 점용 되도록 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 하는 반론을 사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설사 뒤늦게나마 시유지임을 알아내서 사용료와 과태료를 징수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경위를. 사전에 층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점유자에게 알려주고 상의를 해서 구제의 방법을 강구해 줄 수는 없었더란 말인가.
사용료의 징수도 단시일 안에 수십만원을 한꺼번에 내는 것보다는 몇번에 걸쳐서 분납을 하도록 하는 것이 시민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해주는 봉사 행정의 자세이자 최소한의 양식이라 생각된다.
그리그 점유료를 징수할 바에는 점용된 부분을 불하해주는 방법이 집을 헐어버리는 방식 보다는 좋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민이 간신히 마련한 「내 집」을 헌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니까 말이다.
말만 시정은 시민의 일상 생활과 가장 민감하게 맞닿은 국정의 첨단인 만큼 공무원들은 법을 집행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항상 시민에 봉사하겠다는 친절한 자세와 충분한 합리성을 발휘해주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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