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파 두 거장 파리서 동시에 작품전|시리코|에른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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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초현실주의파 두 거장의 전시회이며 예술사의 한 장으로 돌아가 버린 것으로 여겨지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두 거장이 최근 「파리」에서 동시에 작품전을 열어 현대인에게 대화의 문을 열고 있다. 「프랑솨·프티」 화랑에서 「시리코」전과 「그랑파레」에서 「막스·에른스트」전은 금세기 초기에 「다다이즘」이 하나의 혁명으로 대두한 이래 초현실 세계를 오늘까지 탐구해왔고 이를 미술로 구현해온 하나의 사적 의의마저 포함되어 있다. 1919년 당시 27세의 한 젊은 화가가 독일의 「쾰른」에서 전통적인 화폭을 찾으면서 전세계에 물의를 자아냈던 것이 이른바 「다다이즘」의 효시로 이 청년이 바로 「막스·에른스트」였다.
이번 전시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은 그림은 1922년 「막스·에른스트」작인 『친구들과「랑데부」에서』라는 대작. 이 속에는 초현실파의 선구인 「시리코」는 물론, 초현실주의 선언을 한 바있는 시인 「앙드레·부르통」 초현실파에서 「레지스탕스」시로 지양해간 시인 「폴·엘류아르」 등 「젊은 늑대』들이 제나름대로의 심각성을 표정에 담고 모여 있으며 특히 그 자신의 모습도 그려 넣고 있는 것이다. 「여자의 나체, 그것은 철학 교육보다 훨씬 더 현명하다. 숲은 여자다. 여자, 그것은 새이다. 새, 그것은 숲이다. 그러나 숲, 그것은 전혀 여자가 아니다. 그리고 숲, 그것은 전혀 숲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자기 예술을 표현했던 「에른스트」의 예술은 반세기가 훨씬 지나간 오늘날에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3명의 증인이 보는 가운데 아기 예수의 엉덩이를 때리는 성모」라는 긴 제목의 그림도 역사적인 걸작의 하나. 창문에서 성모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3명의 증인은 다름 아닌 바로 「앙드레·부르통」과 「폴·엘류아르」 그리고 화가 (「에른스트」자신?)이다.
「에른스트」가 「프랑스」의 두 시인을 화폭에 담지 않으면 안될 사연은 1920년 그가 최초의 「다다이즘」전을 「테른」에서 열었을 때 「폴·엘류아르」가 그림을 사면서 「파리」에서 일해 주기를 권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전통 예술을 찢어발긴 독일 태생의 화가는 유해 분자로 낙인 찍혀 입국「비자」를 받을 수 없었다. 「엘류아르」는 이때 자기 여권을 빌려주어 「파리」에 오도록 했으며 그와 함께 동고동락을 했는데 이 때의 증언으로 제작된 것이 『친구들과의 「랑데부」에서』인 것이다.
1939년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게슈타포」의 추적을 받아 체포·석방의 되풀이 끝에 유명한 예술계의 괴물 (?)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미국으로 추방되는 신세가 된다. 「도로테아·테닝」이란 친구를 「파리」에서 「엘류아르」와 같이 만난 그는 작품 창조의 길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2차 전이 끝난 후에도 「맨해턴」과 「파리」를 왕래하며 초현실주의 세계의 탐구를 계속했다.
1954년에야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한 그는 1919년 「다다이즘」 운동을 전개한이래 실로 4반세기만의 영광이었던 것이며 1959년에는 「장·카수」 주관으로 최초의 「파리-에른스트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번이 제2차 회고전이 되는 셈이다. 「에른스트」가 「부르통」과 「엘류아르」를 문학적 동지로 가졌다면 그림의 선구로는 바로 「이탈리아」의 화가 「시리코」가 있다. 「나는 그의 그림에서 항상 가족적인 인상을 내 가슴속에 새기게 되었다』고 말한 그가 「시리코」를 발견한 것은 「바로리프라스피치」라는 미술 잡지에서 1920년대 「다다」의 열풍이 그를 휩쓸고 있을 때였다. 『나는 단 하나의 초현실주의 그림도 그린 적이 없다』고 술회한 「시리코」였지만 1914년 작 『봄빛 속의 「토리노」시』등의 일련의 작품에서 누구나 쉽게 「전통의 파괴」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시리코」도 시대적으로 초현실주의 운동 탄생 이전에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 운동의 「멤버」는 아니지만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에른스트」가 입증하듯 누구도 부인 못한다.
「프랑스」 시인 「아폴리에르」는 「시리코」가 표현한 『초현실적 세계』에 감동, 그를 「파리」에 초청해 초현실파 예술인을 소개했고 『초현실주의「그룹」』은 회원으로 삼기도 했었다. 그러나 「시리코」는 1920년대 이후 「네오클래시시즘」으로 들면서 초현실주의자들과는 결코 관련을 맺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의 구미에 맞추어 작품 창조를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왜냐면 어떤 법칙도 주의도 결코 나에게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획 했던 이 두 80고령의 회고전은 어쨌든 「파리」의 화단을 진동시키고 있으며 또한 초현실주의 선구자 (「시리코」는 부인하지만)와 거물이 작품상으로의 「랑데부」가 최초로 「파리」에서 이루어졌다는데 더욱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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