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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사라진 '병행왕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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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구희령 기자 중앙일보 팀장
구희령
경제부문 기자

“헤이코이지메(병행왕따) 말씀이지요? 예전에는 일본에서도 심각했습니다.”

 일본 도쿄의 한 병행수입업체(해외 브랜드 독점수입권자가 아니면서 해당 브랜드를 수입하는 업체) 관계자가 기자에게 말했다. ‘병행왕따’. 독점수입업체가 병행수입업체에 압력을 행사하거나 수리 등 사후서비스(AS)를 거부하는 행태를 일본에선 그렇게 불렀다.

 기자는 지난달 25~27일 일본 병행수입시장을 취재했다. <본지 3월 5일자 b1, b3면> 엑셀·해피니스앤디·브랜드오프 등 전국에 40~50여 개 매장을 둔 병행수입 전문기업들은 큰 규모가 인상적이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일본에선 병행수입 제품을 정식 매장에 맡겨 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유통자주관리협회(AACD) 오타니 노리요(大谷規世) 사무국장은 “1991년 ‘유통·거래 관행에 관한 독점금지법상의 지침’이라는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생기면서 원칙적으로 정식 매장에서 병행수입제품도 AS를 해준다”고 했다. 선뜻 믿기 어려웠다. 한국에선 수입 브랜드라면 머리핀 하나도 국내 정식 매장의 보증서가 있어야만 한다.

 ‘아시아 최고의 명품거리’인 긴자(銀座) 한복판의 화려한 명품 매장에 직접 찾아가서 확인했다. 수선을 문의하자 “제품만 있으면 된다”며 보증서도, 구매 기록도 묻지 않았다. “병행수입 매장에서 샀는데도 해주느냐”고 거듭 물었지만 “어디서 샀는지는 상관없다. 수리 비용도 동일하다”고 했다. 20년 넘게 병행수입 매장을 애용한다는 일본 주부 미나미 시노(南志乃·48)는 “AS가 안 되면 불안해서 어떻게 병행수입 제품을 살 수 있겠느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100만원이 넘는 병행수입 유모차도 정식 매장에서 수리를 안 해줘서 어쩔 수 없이 새 유모차에서 부속을 뜯어내 자체적으로 AS해준다”고 하소연하던 한국 인터넷 쇼핑몰 관계자가 떠올랐다. 한숨이 나왔다.

 또 다른 일본 병행수입업체 관계자는 “가이드라인 제정 이후에도 일부 브랜드는‘부속품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버텼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고가 시계 브랜드 ‘프랭크 뮬러’의 경우 해외 정식 매장에서 산 제품조차 AS를 거부했었지만, 까르띠에 등 경쟁 브랜드가 모두 AS를 해주니까 2~3년 전부터 ‘병행수입제품도 AS’로 방침을 바꿨다고 했다.

 일본의 ‘병행왕따’는 강력한 제재 방침을 세운 학교(정부)와 왕따 행위를 거부한 동급생(소비자)의 힘으로 사라졌다. 왕따 피해학생(병행수입업체)과 가해학생(브랜드)도 자정 노력을 기울였다. 건전한 병행수입시장을 형성하기 위해 한국이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다.

구희령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