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스페인 문단의 한국시인 민용태씨(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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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씨가 「스페인」에 첫선을 보였던 「우화」는 자신이 서울에서 낯선 시인으로 등장하며 들고 나온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또래 세대의 의식이 6·25를 거치며 너무 잔인하게, 너무 일찍, 극한 상황과 부닥치게되어 갈피를 못 잡게 됐다고 느꼈다.
겨우 열살 안팎의 어린눈에 비친 세상은 죽음이라는 상황을 너무 쉽사리 의식하도록 강요했다.
내 나이 열 살이었을 때/나는 엄마와 총부리 앞에 섰다/(중략) 그때/빵 소리 하나가/내 열 손가락을 뚫고/나를 죽였을까. -우화-
민씨는 『내가 설 땅은 어디냐』는 의문 속에서 헤매다가 자문자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국 「고뇌」 흡사해 공감>
나는 기어오른다/내 피는 뻗어 열 손가락/열 손가락으로 앞을 막고/나는 올라간다/이 끝없는 낙하의 층계를/이 끝없는 상승의 층계를. -우화-
민씨의 이러한 자문자답도 어디까지나 의식의 방황에 지나지 앉았다. 만족한 답을 얻을 수 없었던 그의 이러한 의문은 「스페인」어로 시작을 하면서도 계속되었다.
밤에 사람을 죽였다/회색 분자라고/낮에도 사람을 죽였다/빨갱이라고. -Vivo en el extranjero(이방에 산다)-
민씨의 이 시구가 「스페인」어로는 정확하게 쓰여진 것이지만 「리듬」이나 시 형식에서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스페인」사람들이 그의 시를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마드리드」의 저명한 비평가인 「바실리오·가센트」씨는 71년 문학 비평지 「레세니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민씨의 시는 「인텐시티」(격렬함)를 느끼게 한다. 「인텐시티」가 강하기 때문에 「리듬」이나 구조자체를 무시하더라도 사고의 강렬함을 느끼게 한다. 한 한국인이 「스페인」어를 그렇게 정확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이 특히 거짓말 같다.
산문작가로서 널리 알려진 「프란시스코·운브라」씨는 『몸으로 느끼기에 앞서 의도적인 시다. 풍부한 어휘를 소유하고 있는 게 놀랍다』고 관심을 보였다. 민씨 자신 이들의 비평에 저항감이라든가 이의를 갖지 않는다. 스스로 산문적인 시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했던데 대해 수긍한다. 외국어로 시를 쓰면서 절절한 그의 의식의 흐름을 전달하는데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체험이 아무리 처절한 것이었다 해도 시의 형식이나 「리듬」에서까지 이를 표현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탓이라고 자신을 평한다.
시인 자신의 의도와 이를 읽고 느끼는 독자의 감정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언어가 아닌 외국어로 공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내란이라는 상황에서 체험한 비극성이 흡사했고 인간으로서 느낀 그의 아픔이 격렬한 시어를 통해 전달 될 수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여기에 시인으로서의 그의 자질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이러한 그의 시를 두고 시 전문지 「포에시아·이스파니카」는 이렇게 평하고 있다.
『그는 시라는 것이 국경이 없고 북경이나 「샌프런시스코」어디서나 쓸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나뭇잎이 흩어지듯 여기저기 자신을 뿌린다.

<3년 간격으로 시집 발간>
꾸준한 인내와 정열을 가지고 자신의 문학세계를 위해. 인간으로서, 시인으로서 헌신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체험으로 익히지 않고 그냥 배운 언어로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준다.』
71년 민씨는 「마차도」시인협회로부터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마차도」라는 저명 시인의 이름을 따서 만든 문학단체에서 준 것이다. 이해는 그에게 여러모로 분주한 해였다. 첫 시집 『벌거숭이』를 발간했다. 「카밀로·셀라」라는 소설가가 운영하는 「스페인」 유수의 큰 출판사인 「알파구아라」사에서 출판을 수락했던 것이다.
그 동안 2∼3개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해오던 민씨는 시집출판을 계기로 「포에시아·이스파니카」지에 매년 5∼6편씩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국립예술원에서 나오는 「포에시아· 에스파뇰라」가 개제한 「스페인」의 시 전문지다.
첫 시집출판은 또한 그에게 내면적인 생활의 변화를 가름해주는 분수령이 되고 있다. 민씨 자신이 처음부터 의식한 것이 아닌데도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 이래로 차분해지기 시작한다. 격렬한 시어가 줄어들고 서정적인 시어의 빈도수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동안 민씨는 남미 「베네쉘라」의 시 지에까지 작품이 소개되었다. 71년 5월 월간 시 지인 「아라벨·데·푸에고」에 그의 작품이 소개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그는 이 잡지의 동인으로 작품을 싣고있다.
한국 시를 소개할 욕심으로 73년 8월호에 김현승씨의 『견고한 고독』을 번역, 게재하여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민씨 자신 생활에 쫓기다보니 의욕에 비해 실제 번역작업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격렬함」 느끼게 하는 시>
그렇지만 자신의 시상만은 틈틈이 가다듬어 3년 동안 발표하고 모아 두었던 38편의 작품을 모아 74년 4월 두 번째 시집 『푸른대지』를 출판했다. 첫 번째 시집 『벌거숭이』가 「페시미즘」을 주조로 강렬한 현실에 대한 대결의식을 보였던데 비해 두 번째 시집은 너무나 대조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산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가진 이유를 몰랐다/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들판이 과일과 꽃이 듬뿍한 바구니를 주는 이유를 몰랐다/내 아들아 네 곁에 잠들기 전까지는/메아리지는 것은 모두 꿈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그의 변화를 두고 문학 비평지 「에스타페타」는 『직접적이고 동양적인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은 형식을 갖추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의 양원에 충실할 수 있는 예다. 서양에서는 「플라토니즘」으로 이어질 수 있는 동양적인 감정』이라고 평했다.,
시인 「마누엘·피니요스」씨는 그가 윤회문제를 다루어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데 관심을 표명하며 『그의 언어는 완전한 문학용어를 구사하고 있다』고 논평함으로써 민씨의 시어에 구어적인 「리듬」이 아쉽다는 점을 은연중에 지적, 앞으로 민씨가 새로 다듬어야 할 방향을 제기해주고 있다. <마드리드=김동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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