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놀」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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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의 소금물·약「알칼리」성·자율신경계의 작용에 따라 누선에서 분비. 이것이 사람의 눈물이다.
눈에 먼지가 들어갔을 때의 눈물이나, 단장의 슬픔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나 그 성분은 같다. 누선의 크기도 남녀의 차이가 없다.
속담에 『남자는 일생에 세 번 운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 태어날 때의 울음을 제외하면 70 평생에 눈물을 흘릴 기회란 두 번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생존상황이 눈물보다는 의지와 소망의 산물이라는 한 교훈인 것 같다.
「스탈린」은 원래 「러시아」어로 「철인」이란 뜻이다. 그는 어떤 사기록을 보아도 일생을 통해 눈물을 흘린 흔적이 없다. 철인 다왔다. 그러나 1932년 그의 아내 「나제지다」 가 자살한 뒤 그 묘 앞에선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는 있다.
「히틀러」는 『대중은 여자와 같다』고 설파했었다. 정말 그는 대중연설을 하며 청중들의 감정을 임의로 조작할 수 있었다. 그의 웅변이 목이 메어 떨릴 때는 청중들도 가슴이 찡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나간 역사는 그런 일들이 오히려 희극이나 다름없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의 유세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민주당의 「머스키」 예비후보는 자신을 비판하는 신문기사 얘기를 하다말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하루아침에 유권자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감정이 그렇게 불안정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해방 후 환국 첫 연설을 하며 눈물을 흘렸었다. 동란 중 평양 입성 때에도 그는 평양시청 광장에서 연설을 하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감정이 복받쳤을 것이다. 그때 청중들도 모두 가슴이 뭉클했었다.
눈물을 흘리는 상황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때로는 모든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공감의 눈물도 있다. 공동의 운명에 대한 공명, 그 투지와 인내로 성취한 승리감의 눈물 등이 그런 것이다.
1일 밤 「크메르」의 「론·놀」 대통령은 망명길에 오르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외신은 그의 아내가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 그 많은 눈물 가운데 「론·놀」의 그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철조망이 쳐진 대통령 관저의 주위를 지나가는 「프놈펜」 시민들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있었다』―.
외신의 「시니컬」한 「스케치」기사 한 줄. 실로 그의 눈물에도 1%의 소금이 들어 있었을까. 누구도 감동시키지 않는 눈물이었으니 말이다..
잘못된 정치인의 비판은 그런 눈물을 흘릴 때 더욱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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