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獨·러, 美비난 자제 유화 제스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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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라크 전쟁 반대에 열을 올렸던 프랑스.독일.러시아 등 반전(反戰)국가들이 미묘한 입장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현실이 되면서 조심스럽게 대미 관계 회복을 모색하는 조짐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전후 처리를 염두에 둔 발빠른 행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반전의 선봉에 섰던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20일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 "정당성이 없으며 매우 유감스럽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도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인명피해를 줄여달라"고 당부해 무력행사를 사실상 묵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라크전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더 이상 미국에 맞설 생각은 없다는 속내를 드러냈다고 볼 수도 있다. 정부 정책과는 달리 반전 여론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영국에서도 개전 후 21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는 영국민의 53%가 이라크전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이슬람국가인 이라크를 적대시하고 미국 편을 드는 것에 대한 국내 여론의 부담을 안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터키 역시 겉으로는 개전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뒤에선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지원하고 있다.

터키 의회는 20일 이라크를 공격하는 미군의 터키 영공 통과를 뒤늦게 승인했다. 사우디는 자국내 이라크 접경지역과 북부지역에 수천명 규모의 미군 주둔을 허용하고 있다.

사정은 독일과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독일정부는 미국의 이라크 공습이 시작되자 노골적인 미국 비난을 자제하고 "전통적인 독.미 우호관계에는 변함이 없다""전후 이라크 재건에 유엔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요슈카 피셔 외무장관은 20일 의회연설에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자국민을 대량살상무기로 두번이나 공격한 '독재자'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도 "이른 시일 안에 전쟁을 끝내달라"는 요구와 함께 전후 복구과정에서 전적으로 미국에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 행사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이라크 사태로 인한 후유증을 걱정하고 있다.

미국의 분노와 배신감이 외교관계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차피 터질 전쟁인데 굳이 나서서 미국에 대항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국내 여론도 작용하고 있다.

과제로 남은 유럽연합(EU)의 분열상 봉합과 전후 중동질서 재편 및 이라크 복구사업 참여 과정에서 이들 국가들이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불가피하다.

특히 러시아는 이라크 전쟁이 끝나 미국이 이라크를 장악하게 되면 미국에 석유개발권 허용을 부탁해야 할 처지다.

지금까지는 미국을 상대로 한 프랑스와 독일의 외교적 힘겨루기에 편승해 왔지만 경제적 측면을 고려할 때 미국과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목소리가 국내에서 높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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