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명작 속 사회학 (30) 『한스 브링커 혹은 은 스케이트』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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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홍주연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중계방송으로 스피드 스케이팅 종목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이는 네덜란드 선수들을 보다 보니 이 동화가 생각났다. 미국 작가 메리 도지 여사가 1865년에 발표한 『한스 브링커 혹은 은 스케이트』란 작품이다.

한스와 그레텔 남매는 암스테르담 근처 마을에 산다. 아버지 브링커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제방 수리 공사를 하다가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설상가상으로 사고 전에 전재산인 현금을 들고나갔지만 기억을 상실했기에 그 돈을 찾을 수도 없다. 그래서 한스네는 어머니가 일을 해서 근근이 살고 있다. 스케이트화 살 돈도 없어서 한스가 나무를 깎아 만든 스케이트를 타고 있지만, 둘 다 다른 아이들 못지않게 스케이팅 실력이 뛰어나다. 남매는 은 스케이트가 상품으로 걸린 스케이트 대회에 나가고 싶어한다. 가난하지만 예의바르고 고운 마음을 가진 남매에게 감동받은 주위 사람들 덕분에 둘은 쇠 날이 달린 새 스케이트화를 사서 대회에 출전하고 아버지도 무료로 수술을 받게 된다. 그레텔은 대회에 1등을 하고 아버지의 수술도 성공한다. 아버지의 기억이 돌아와서 잃어버린 돈도 찾고 한스는 의대에 진학해 훌륭한 외과의사가 된다.

이 동화는 19세기 전반기의 네덜란드 문화를 잘 담아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미국인 작가가 미국에서 썼지만, 이웃 네덜란드 이민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작품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한스 남매는 물론, 모든 주민들이 겨울이면 얼어붙은 운하에서 스케이트를 즐겨 타는 것, 마을 단위로 스케이트 대회가 열리고 주민들이 대회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을 보면 네덜란드가 스피드 스케이팅 강국이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를 알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스케이팅은 자연스런 생활이고 문화이고 전통이었다.

서북부 유럽의 저지대에 있는 네덜란드는 나라 이름 자체가 ‘낮은 땅’이란 뜻일 정도로 국토의 30%가 해수면보다 낮다. 사람들은 이 낮은 땅에 둑을 쌓고 물을 퍼내고 물길을 돌려 운하를 건설해서 살았다. 그래서 암스테르담·로테르담 등 네덜란드의 도시 이름에는 ‘담’ 즉, ‘댐’이 많이 들어간다. 네덜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13세기에 어민들이 암스텔강에 댐을 만들어서 건설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둑을 쌓아 바닷물이 넘쳐 들어오는 것을 막고 총 연장 6000여 km가 넘는 운하를 관리하는 것은 네덜란드 주민들의 생존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은 스케이트』에 등장하는 한스 남매의 아버지 브링커씨처럼 제방을 관리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기에 겨울이 되어 운하가 얼어붙으면 네덜란드 국민은 집 가까운 운하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더 이상 홍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기뻐하곤 했다.

이렇게 중요한 운하이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이 스스로 운하의 제방을 터뜨린 역사도 있었다. 네덜란드를 지배하던 스페인에 항거하여 80년에 걸친 독립전쟁 중이던 1574년, 독립군이 레이던 시를 포위공격할 때의 일이다. 독립군을 지휘하던 오라녜 공(公) 빌렘은 레이던 시의 상류에 있는 제방을 터뜨려 바다에서 시내로 직접 보트를 타고 해군이 들어가서 에스파냐 군대를 몰아냈다. 빌렘은 지금도 네덜란드의 국부(國父)로 숭상받고 있으며 현재 네덜란드 왕가의 조상이 됐다. 그래서 이번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네덜란드 스케이트 선수들은 물론,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은 주로 오렌지 색 유니폼을 입고 있다. (네덜란드 왕가의 성인 ‘오라녜’는 영어로 ‘오렌지’이다.)

참, 이 동화 『은 스케이트』가 워낙 미국에서 유명해져서, 손가락으로 제방의 구멍을 막은 네덜란드 소년의 이름도 ‘한스 브링커’라고 미국에,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잘못 알려져 있다. 그 이야기는 네덜란드의 전해지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년 영웅의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

박신영?『백마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저자, 역사에세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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