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hi] 그녀가 얼음에 남긴 궤적, 역사가 됐다 … 아디오스 연아, 네 덕분에 행복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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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때 당신의 고모는 이웃집에서 버린 빨간색 스케이트를 주워다줬다지요. 당신은 주춤주춤 빙판 위에 스케이트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긴 선을 그려 왔을까요. 얼마나 많이 엉덩방아를 찧었을까요. 당신은 4년 전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없는 피겨를 대한민국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빙판으로 돌아와 러시아 소치에서 또다시 멋진 도전을 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뜻의 피겨(figure). 당신은 얼음 위에 가장 아름다운 선을 그렸습니다. 그 선이 이어져 역사가 됐죠. 그 궤적이 그려지는 동안 우리는 벅찼고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디오스 노니노(프리 스케이팅 곡), 굿바이 연아. 사진은 지난해 12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열린 골든스핀오브자그레브 대회 갈라쇼에서 김연아가 빙판 위로 솟구쳐 오르는 장면. [게티이미지]

음악이 멈추고, 그녀도 멈추었다.

 쏟아지는 박수 소리와 꽃다발에 파묻힌 스물네 살의 여자. 얼음판 위에 홀로 서 있는 피겨의 여왕은 고독해 보였다.

 오늘 새벽 열렸던 소치 올림픽 프리 경기는 그녀의 마지막 무대. 이십 년에 걸쳐 오로지 한 길을 달려온 긴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지금 연아는 무슨 생각을 할까. 몇 년 전에 인터넷 동영상으로 ‘죽음의 무도’를 본 뒤부터 나는 그녀의 팬이 되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소름 끼치는 연기에 전율했었다. 얼음판 위를 날아다니는 그녀가 한국 사람? 믿기지 않았다. 아, 우리에게도 이런 아름다움이 있었구나. 감탄했다.

 키 1m64㎝에 몸무게 47㎏의 젊은 여성이 감당하기에 엄청난 부담을 안고 그녀는 두 번째 올림픽을 준비했다. 그리고 ‘피겨 여왕’의 면모를 다시금 각인시켰다. 마지막을 멋지게 마무리한 그녀에게 박수를 보낸다. 잘 가라 김연아. 너 덕분에 행복했다. 고마워.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이제 또 다른 멋진 삶을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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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왕의 마지막 쇼트 무대를 기다리던 19일 저녁에, 어린 날의 나를 떠올렸다. 열 살 무렵의 내가 가장 갖고 싶었던 물건은 스케이트였다. 내가 다니던 세검정초등학교는 겨울방학 동안에 운동장을 얼려 학생들에게 개방했다. 밑창에 쇠날을 댄 희한한 구두를 신고 얼음판을 달리는 아이들이 부러워, 어려운 집안형편을 알면서도 부모님을 졸랐다. 비싸다고 반대하는 엄마를 제치고, 기분파인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서울 동대문운동장의 운동기구 상점에 갔다. 하얀색이 빨간색보다 비쌌다. 눈처럼 하얀 스케이트화를 욕망했으나, 아버지는 내후년에도 신을 수 있게 내 발보다 두어 치수 큰 빨간색 스케이트화를 사주셨다.

 두꺼운 양말을 두 겹 대도 헐거워 신발끈을 꼭 조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어깨 너머로 피겨 스케이팅을 배웠다. 뒤로 팔자를 긋거나, 한 발을 들고 뱅글뱅글 도는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5학년 때 교통사고로 무릎을 다친 뒤 얼음판에 서기가 두려웠다.

 마지막으로 스케이트화를 신은 게 언제였지? 기억을 뒤지는데 벌써 자정.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여왕의 귀환!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야 한다고 난리 치는 언론이 못마땅했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나 역시 그녀를 응원했다. 경쟁자인 선수들의 실수에 안도하면서 은근히 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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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 전 밴쿠버 올림픽의 본드걸 이미지가 워낙 강했던 것이었을까. ‘어릿광대를 보내주오’의 음악과 안무는 내게 좀 밋밋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만큼 얼음판 위에서 자유로운 선수는 없었다.

 그 어려운 점프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뛴다. 너무 쉬워 보여 나도 스케이트만 신으면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작과 동작 사이의 유연함, 부분적인 요소들을 이어 붙이는 노련함에서 그녀를 능가할 선수는 없었다.

 내가 연아에게 감탄하는 건 점프나 스핀 같은 스케이트 기술이 아니다. 러시아의 10대 소녀 선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 이탈리아의 노련한 선수 카롤리나 코스트너의 스핀도 훌륭했지만 빙판을 미끄러지는 팔과 다리는 김연아처럼 편해 보이지 않았다.

 연아의 연기는 완벽했다. 쉬워 보이는 문장이 사실 쓰기 어렵듯이, 그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그녀는 쓰러지고 일어나는 과정을 되풀이했으리라.

 피겨 스케이팅은 예술과 운동이 접목된 스포츠. 의상이며 선수의 얼굴 화장에 이르기까지 그 나라의 미적 수준을 대변한다. 김연아는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이 IT강국에 버금가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세계에 알렸다.

빙판을 내려오는 그대여, 아름답다. 우리는 너를 잊지 못하리.

 아디오스.

◆최영미=1961년 서울 출생. 92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80년대의 현실과 삶을 고발하고 부정한 첫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돼지들에게』『도착하지 않은 삶』 등. 산문집 『시대의우울』 『화가의 우연한 시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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