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한국의 문화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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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올해로 30돌을 맞는 1945년의 해방은 정치적인 광복과 함께 문화적인 광복을 약속하는 출발점이었다. 우리는 그때 빼앗긴 나라와 겨레를 되찾았을 뿐 아니라, 잃었던 말과 글과 문화도 다시 찾게 되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우리는 우리의 정부를 갖게 되었고 문학·예술의 제 분야에서 우리의 문화를 형성해 왔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 투쟁을 하던 세대는 이미 물러나고 국권의 존재를 당연한 소여로서 받아들이며 성장한 세대가 모두 주역을 맡게 된 오늘의 우리 정부와 우리 문화계는 그러나 지금 어느 때보다도 위기적인 상호 대치 속에서 해방 30주년을 맞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헌정 질서와 인권 문제를 둘러싸고 지난해 한햇동안 내내 예각적인 대립을 보여온 분열된 국론은 그 한쪽에 정부 권력이, 그리고 그에 반대되는 다른 한쪽에 문화인·종교인·언론인 등의 문화계가 진을 치는 심상찮은 양상을 노정 시키고 있다. 정치와 문화가, 권력과 정신이, 그리고 정부와 언론이 이처럼 상호 부정적인 분극화 현상을 빚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른바 한국적인 「현실」에 대하여 제1차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정치 권력과 보편적인 「이념」에 대하여 발언할 책임을 지고 있는 정신·문화계가 서로 동일한 사상을 같은 언어로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같은 문자를 가지고 같은 현실을 가리키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다.
불과 30년전에 같은 나라와 같은 말과 같은 글을 되찾은 같은 겨레끼리 공통의 언어를 상실하고 대화조차 어렵게 되어간다는 이 현상이야말로 우리가 한 세대 동안 걸어온 어지럽고 어려운 역정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75년의 한국 문화가 당면한 첫 과제는 이처럼 서로 부정적인 양극화로 내닫고 있는 정치와 문화, 혹은 권력과 지성이 상호 신뢰를 회복하여 적어도 대화를 위한 공동의 광장을 마련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정치 권력의 편에서 먼저 손을 써야 되고 정치 권력만이 능히 선수를 쓸 수 있는 과제다.
민주주의란 어떤 권력도 완전할 수가 없고, 절대적일 수 없다는 기본 합의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이 같이 불완전한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지성을 그의 불가결한 동반자로서 제도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권력에 대하여 비판적 거리를 갖는 지성의 존재는 민주적인 사회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그리고 이 같은 비판적인 지성의 소임을 맡고 있는 것이 민주 사회에 있어서의 문인·교수·언론인·종교인들이다. 정치와 문화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부 권력이 비록 때로는 귀찮다고 느껴질 망정 지성·정신·언론의 본질적 기능을 이해하고 그들의 달갑지만은 않은 발언을 사 주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사준다」는 말은 두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우선 이러한 비판자적인 존재와 그의 발언을 수용하고 평가해 준다는 소극적·일반적인 뜻을 갖는다. 정치와 문화의 불행한 관계는 지성이 권력을 비판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양자의 정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참된 불행은 권력이 지성의 발언을 막아 버림으로써 양자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리는 상태를 말한다. 정치와 문화가 상호 신뢰를 회복하고, 대화의 광장을 되찾는 길은 권력이 자기에 대하여 비판적 거리에 서있는 지성의 입장을 사주고, 그 발언을 평가해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다음으로 「사준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어떤 물건을 사준다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정부의 문예 부흥 5개년 계획은 올해 그 2차 연도를 맞는다. 금년 한 햇동안 이를 위해 투입될 예산만도 46억원을 헤아린다고 한다. 쓰기에 따라서는 능히 큰 성과를 기대해 볼 만한 적지 않은 금액이다.
그러나 지난해 제1차 연도의 진행을 보면 정부가 문화계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창의의 소산을 사주었다고 하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문화계에 타율적인 「주문 생산」을 요구함이 앞서지 않았던가 싶다. 그로해서 문화계가 자칫 정책 당국의 하청 기관으로나 전락한 듯한 인상을 조금이라도 주었다면, 그것은 참된 문예 부흥을 위해서 결코 바람직스런 일이라 할 수 없다. 문화가 정치의 「위」에서 부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또한 정치의「밑」에 종속될 수도 없는 것이다.
정부는 문예의 주문 생산이 아니라 그의 자발적인 소산을 주문 없이 사주는 도량이 있어 좋을 것이다. 시장성이 없는 실험적인 작품, 심지어는 비현실적·반정부적 작품조차도 국고예산으로 도서관과 미술관의 수장을 위해서 사들이고, 일반 청중이 등을 돌리는 전위 음악의 공연을 위해서 지방의 공공 예산으로 보조금을 주는 선진국의 사례들이야말로 배울만한 문예 진흥 정책들이라 할 수 있다.
정부가 필경은 오늘의 국가 권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면, 문화가 봉사하는 시공의 차원은 그를 초월한 것이다. 문화는 오늘과 함께 영원을 상념하고, 당장의 국익에 못지 않게 인간 일반·인류 전체를 위해서 봉사할 때에야만 참으로 문화의 이름에 해당되는 것이다. 정치는 문화의 이러한 차원을 이해하고 사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정치와 문화와의 건전한 관계의 정립이란 권력만의 책임이라거나 권력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 이룩될 수는 없다. 정치 권력이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을 공격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문화는 문화 자체를 지키려는 노력을 다하였는가를 먼저 물어야 될 것이다. 문화인 스스로가 외부의 주문 생산에나 응하는 정신적인 청부업자로 자족하고 있는 한 거기에서 권력과 지성의 생산적인 긴장 관계는 이뤄질 수 없고 건설적인 비판의 거리는 유지될 수 없다.
특히 수많은 문화 단체들이 문화인의 자기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최저의 기능마저 외면한 채 상부 또는 외부의 뜻이나 하달하는 가장 비문화적인 「채늘」로 타락해 버렸다면 깊이 반성하여 구각을 탈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 단체들이 해방 직후 좌우익이 격돌하던 이념 투쟁의 시기에 「애국」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역사적인 역할만을 반추하고 안주하고 있기에는 오늘의 현실은 너무나도 다른 상황속에 놓여 있다. 광복 30년이면 이들 문화 단체들도 새로운 출발을 모색해서 마땅할 시기라 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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