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집행 알리자 창백한 표정…흐느끼며 최후진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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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문세광의 사형집행은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새벽녘에 이루어졌다. 문이 그의 감방에서 1백m쯤 떨어진 사형 집행실에 들어선 것은 상오7시5분. 20평 가량의 사형 집행실 복판에 놓인 의자에 문이 앉자 그 맞은편에 집행지휘검사인 대검 조태형 부장검사와 집행관인 박도형 서울구치소장·검시관인 서울구치소 의무과장 등 집행관계자들이 앉았었고 문의 좌우에 10여명의 계호 및 형 집행보조원들이 둘러섰다.
맨 처음 집행관이 이름·본적·주소 등 인정신문을 시작하자 그 때까지도 문은 사형집행절차가 시작된 것을 모르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해 나갔다. 공판 때와는 달리 처음부터 안경을 벗은 채 간단한 오랏줄로 두 손을 묶여 나온 문은 인정신문 중 이름과 본적만을 서투른 우리말로 대답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일본말로 응했다.
인정신문이 끝난 뒤 지휘검사가 사형을 확정한 판결문을 낭독하고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으면 하라』고 최후진술의 기회를 주자 비로소 집행되는 것을 알게된 듯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사형이 집행되는 겁니까』며 반쯤 일어서려 했다.
집행관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문은 약 1∼2분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쳐들며 『알았다』고 짧게 대답한 뒤 그 때부터 흐느끼기 시작했다.
문은 잠시 후 냉정을 찾은 어조로 『나는 바보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이 같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며 지금 이 처지의 내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고 말문을 열며 본격적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문은 일본말로 약10분간에 걸쳐 최후진술을 계속 박 대통령과 육 여사 「죽은 사람이(장봉화양을 가리키는 듯) 및 그 가족 순으로 미안하다는 유언을 해나갔는데 특히 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세 번이나 했으며 육 여사에 대해서는 『저 세상에 가서도 잘못을 빌겠다』고 울먹였다고 입회관계자들이 전했다.
문은 가족 중 어머니에 대해 『나를 장가보내주고 아들을 키우는 동안 뒷바라지를 해주셨는데… 못된 일을 저질러 뭐라 용서를 빌 수 없다』고 말했고 부인 강성숙 여인에 대해서는 『나이도 어린데 재가해서 제2의 인생을 살아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문은 특히 『아들은 형님내외가 맡아서 길러주도록 꼭 부탁한다』는 말을 두 차례나 집행관에게 강조했다.
문은 이 진술에서 『조총련과 그놈들에게 속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되뇌었다고 전해졌다.
집행시간이 아침식사 전이었기 때문에 문은 이날 아침을 먹지는 않았으나 10분 동안의 최후진술동안 목이 메는 듯 교도관이 따라주는 무거운 보리차를 두 번이나 마셨다.
구치소 측은 문을 위해 담배와 평소 그가 즐겨 마시던 「코피」를 마련했으나 청하지 않았다.
최후진술을 하는 동안 문은 계속 흐느껴 때때로 말을 중단했으며 홀린 눈물로 앞가슴부분이 흥건히 얼룩져 있었다.
최후진술이 끝난 것은 상오7시27분. 바로 이어 구치소 교회사인 김치연 목사가 3분동안 문을 위해 기도하는 동안 문은 두 손을 마주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계속 울먹였다.
이 기도는 통역되지 않았으며 바로 이어 문의 좌우에 있던 10명의 집행보조교도관들이 다가가 용수모양의 흰 무명자루로 얼굴을 씌우고 일으켜 세운 뒤 바로 뒤에 있던 「커튼」을 겉고 올가미가 있는 장소로 옮겨 세우는 동안 문은 전혀 반항하거나 소리치지 않고 계속 흐느끼며 어깨를 들먹였다.
상오7시31분 문의 목에 올가미가 씌워지고 이어 집행관의 지휘로 문이 서있는 마루판자가 『덜커덩』하고 열리며 문은 공중에 매달렸다.
정확히 20분 동안 매달려있던 문이 내려진 뒤 약5분 뒤 의무관이 검시, 문세광의 사망을 확인했다.
문은 서울구치소 4사 상 등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담당변호인인 송명관 변호사로부터 신앙을 갖도록 여러 차례 권유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법무부장관의 문에 대한 사형집행명령은 19일 하오 났으며 밤늦게 관계자들에게 통보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문의 사형집행소식을 들은 송 변호사는 『그동안 여러 차례 만나는 바람에 인간적으로 정이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대통령도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제2,제3의 문이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하고 『국선변호인으로 어려움도 많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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