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 기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바둑 두십니까』, 『장기 두나』, 『고누 두느냐』는 말이 있다. 장유의 별이 없이 바둑을 둔다면 대접을 받는다.
그래선지 「골프」가 보편화되기 전에 명사들에게 취미를 묻는 난에는 으레 독서와 바둑이란 답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또 골패나 투전을 하다 오라 신세를 졌다는 말은 있어도 내기바둑 때문에 잡혀갔단 말은 아직 못 들었다. 놀음이라면 선비의 놀음이요, 노름이라도 떳떳한 놀이가 바로 바둑이다. 아버지와 화투를 쳤다면 몹쓸 집안이 되나 바둑을 익혔다면 제법 법도 있는 집안으로 보인다.
종횡으로 각각 19도를 그어 3백61로를 이루는 바둑판 위에서 흑백이 자웅을 다투는 수를 순열·조합으로 풀어보면 몇 조라는 숫자가 나온다. 따라서 평생토록 두어도 같은 기보는 나오지 않는다는 말도 믿기 어려운 엄연한 진실이다.
바둑의 전래에 대하여는 요가 그 아들 단주를 일깨우기 위하여, 또는 순이 그 아들 상균을 가르치기 위하여 창안하였다는 중국 기원설과 약 3천년 전에 인도에서 발상하여 전해졌다는 인도 전래설이 있다. 그 어느쪽이든 오래 전에 동양에서 나왔음은 분명하며 아직도 동양 3국에서 성하는걸 보아도 역시 동양적인 유희다.
우리 나라는 물론 중국에서 전해졌는데 그 정확한 연대와 경로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바둑을 잘 둔다』(『신당서 고구려전』), 『바둑을 가장 좋아한다』(『후주서 백제전』),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많다』(『구당서 신라전』)는 등으로 중국측 기록이 전하는 바와 같이 이미 삼국시대는 널리 행하여졌다.
고려조에는 관기시 40편이 있으며 유명한 『예성강곡』이 당 상인에게 바둑에 져서 애처를 빼앗긴 비애를 읊은 노래라는 것만 보아도 호상의 도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조에서는 선조가 명의 사신과 대국할 때, 먼저 중앙에 한 점을 두니 과연 왕자의 기상이라며 명사가 패를 자인했다는 설화도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기도는 끊이지 않았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이웃 일본에 전문기사를 양성하는 바람이 불어 높은 수준을 자랑하였다. 특히 「기나니』(목곡)와 중국인 오청원이 나타나자 새 기풍이 일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권불십년, 무대는 다시 일전하여 역시 중국인 약관의 기사 임해봉이 혜성같이 나타나 기계를 휩쓰는 듯이 보였다.
그때, 우리의 조치훈군은 10세의 어린이였다. 그는 이미 목곡의 문하에서 재능을 인정받고 피눈물나는 수업을 계속한지 5년이었다. 가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자고 깨며 이 소년은 무슨 꿈을 가졌을까. 아무튼 다시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이번에 그는 임해봉을 물리치고 정상인 「사까다」(판전)와 일본기원 선수권을 겨누고 있다. 그의 시대는 다가오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