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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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영국시인 「T·S·엘리어트」의 『황무지』라는 시가 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유명한 장시이다. 세계문학사에 남는 작품인 만큼, 여러 나라의 말로 번역돼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시인, 흑은 영문학자들의 번역에 의해 익히 소개되어 있다.
최근 국내의 한「세미나」서 이 시의 번역문제가 잠깐 거론된 일이 있었다. 제2부「장기」편의 한 구절이 화제가 되었다.
어느 시인은 그 구절을 『…동분을 뿌린 커다란 바닷나무는/난로 앞 오색 대리석 기둥 사이에서 초록빛·유자 빛으로 피어올라…』로 번역했다.
바로 그 가운데서 「동분」이 문제가 되었다. 원문의 「…with copper」를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번역을 보면 『구리화저』로, 또 어떤 번역은 『구리못』으로 까지 되어 있다. 과연 어느 표현이 원작자의 뜻에 가장 가까운 것인지 범연한 독자들은 모를 일이다.
마침 한 역자가 「엘리어트」를 만난 일이 있었다. 「엘리어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동분」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뉴잉글랜드」지방의 한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상류가정에선 겨울이면 벽난로 앞에 앉아서 한담으로 꽃을 피우는데, 그 흥취를 돋우기 위해 장작불 위에 동분을 뿌린다는 것이다. 동분은 불길 속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고 한다. 이런 동분은 그쪽 지방에선 흔하게 보는 상품이기도하다.
언젠가「에릭·시걸」의 소설『러브·스토리』의 국내역본을 읽으며 고소를 지은 일이 있었다. 미국 주명의 하나인 「로드아일랜드」를 서슴지 않고 「로드」섬으로 번역하고 있었다.
지금 오역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역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번역이란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를 아는 것은 보다 중요한 것 같다. 앞서「엘리어트」시의 오역은「그래머」(문법)나, 어휘선택의 과정에서 빚어진 잘못은 결코 아니다. 그 고장의 풍습, 혹은 의식 등에 어두우면 그럴 수밖에 없다. 번역을 하는 작업 속엔 그런 것까지도 알고 있어야 하는 해박한 예비지식과 교양이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
후자의 『로드 섬』 운운은 필경 졸속과 무책임의 소산일 것 같다. 전통문화의 이해부족에서 빚어진 오역이나, 졸속·무책임에 의한 오역이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은 우연이 아니다.
그 때문에 외국어의 번역은 주역이 풍부할수록 독자의 이해에 도움을 준다. 「엘리어트」의 시만 해도「B·프리어」같은 사람은 깨알같이 주를 달아놓고 있다.
한 외신에 따르면 우리 나라는 세계 제33위의 번역국으로 집계되어 있다. 「유네스코」보고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번역본이 제일 많은 나라는 소련, 2위는 서독, 3위는 스페인…일본은 7위. 과연 우리의「33위」는 자랑스러운 번역들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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