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되찾은 「시나이」반도-주섭일특파원이 7개월만에 본 「이집트」의 표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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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시나이」반도에서 포성이 멎은 지 7개월, 다시 본 「카이로」는 벌써 전쟁을 말끔히 잊은 듯 했다. 「호텔」마다 가득 찬 미국인들, 휘황찬란한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밑에 흥청거리는 인파…10월 전쟁 때 기자가 겪은 등화관제하의 「카이로」는 아니었다. 시민들의 표정도 「뉴스」에 귀를 기울이며 일희일비하던 모습과는 달리 명랑하고 낙천적인 본래의「이집트」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낙천적인 카이로>
「사다트」대통령이 지난 15일 국민투표에 붙인 「사다트」의 「10월 백서」가 통과되면 「이집트」는 「나세르」의 강력한 사회주의 노선에서 「사다트」의 온건 사회주의로 그 노선이 바뀐다. 「사다트」는 강력한 사회주의체제로 이행을 시도하던 「나세리즘」만으로는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려 온 「이집트」를 부흥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예컨대 외국 자본을 도입해서 산업화를 추진하고 전쟁으로 황폐화된 「수에즈」연하지역의 「포트사이드」「이스메일리아」「수에즈」시 등을 복구하려해도 「나세르」의 유물인 국유화 법에 묶여 외국 자본을 유치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같은 사회주의체제의 모순을 시정하고 과감히 자유화체제를 부활시키자는 것이 바로 「10월 백서」인데 그 제1단계로 새로운 외자 도입법이 지난주에 각의를 통과, 국회에 제출되었다는 것이다.

<「사다트」주의 탄생>
이 법은 외국자본이 국유화나 몰수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어있으며 일정기간 도입시설재 등의 관세면제 등을 규정, 외국자본의 도입을 촉진하기 위한 것.
지금까지 20여년간 「아랍」세계를 지배해 온 「나세리즘」이 완전히 침몰하는 대신 새로운 「사다트」주의가 탄생하는 순간을 본 기자는 목격한 셈이다.
「사다트」가 지난 10월 전쟁 때 비록 승리했다고 자부할 수 없다해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평화주의자로서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감히 「나세리즘」의 이탈을 감행하려는 야릇한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 것으로 보였다. 「새바람」의 일례가 미국과의 복교. 「카이로」의 중심가인 「가른시티」에 미국대사관이 들어앉은 지 불과 몇 달되지 않았는데도 「택시」운전사들이 「엠버시·오브·아메리카」만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닉슨」을 공격하고 있는 미국여론의 배후에도 「유대」인들의 음모가 숨어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닉슨」을 두둔하는 「알·아람」지의 한 기자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 『미국은 대적이며 미국과 가까운 모든 나라는 적』이라는 방정식이 불과 몇 달만에 무너졌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다트」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뜻은 적어도 『「수에즈」운하와 「시나이」반도에서의 평화』란 목적만은 달성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호텔마다 미국인>
「이집트」에서 만난 어느 군인이건 붙들고 『왜 전쟁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한결같다. 『평화를 위해서, 실지회복을 위해서…」 그러나 그 「평화」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기른 것인가 하는 것은 격전지였던 「수에즈」운하 일대를 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외국특파원 30여명과 함께 소순 함 「인천호」를 방문하고(방문기는 5월17일에 보도됨) 돌아오는 길에 「헬」기 위에서 유명한 「바를레브」요새를 살펴 볼 수 있었다. 『상공에서는 모래성 같이 보이지만 맨 밑바닥에 각목을 깔고 그 위에 철만을 감았으며 또 다시 그 위에 「시멘트」를 깔았다. 한 요새마다 1t가량의 돌을 넣은 50∼1백개 가량의 철사 주머니가 쌓여 있었고 상하 좌우로 포신을 움직일 수 있는 대포가 수 문씩 있었다. 우리 군대의 공격에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군의 방어를 위해 나타난 것이 「셔먼」「센추리언」등의 「탱크」들이며 이것들은 우리들의 대전차 유도탄에 모두 녹은 것이다.』
이 설명이 없더라도 요새 주변에 검붉은 「탱크」의 시체들이 잘 내려다 보였다. 「포트사이드」에서 「가자」로 가는 「페르단」철교가 수많은 폭격에 여기저기 끊기다 못해 쇳덩이가 하늘로 치솟아 있다.
「바를례브」요새는 비록 돈은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으나 적은 병력으로 적에게 위압감을 주어 기를 꺾는다는 고정방어의 장점이 있다.
이 재래식 방어는 인구가 적은 「이스라엘」로 보아서는 효과적인 것이지만 「이집트」군이 재래식이 아닌 「미사일」등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자 무참하게 무너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현대전에 있어서 고정방어보다 이동방어가 유리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집트」군도 큰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이스라엘」이 「아랍」에 대한 모멸의 상징으로 삼았던 이 3층 높이의 견고한 요새가 녹았다는 것은 「사다드」의 전쟁 승리론을 부인할 수 없게하는 근거가 되는 것 같다.
「수에즈」의 관문 「포트사이드」나 「이스메일리아」시는 불타버린 「탱크」와 「트럭」, 파괴된 「벙커」의 모습이 군데군데 눈에 띄어 이들 도시의 파괴는 85%에 이르는 것 같았다.

<큰 희생 치른 평화>
전쟁 전에 35만명이 살았다는 「이스메일리아」는 현재 고작 5천여명에 불과하다고 한 시청관리는 말했다.
「이집트」정부는 5천2백만「달러」의 부흥기금으로 이제야 「포토사이드」 「이스메일리아」「수에즈」등 세도시의 복구에 나서고 있다.
탄혼이 박히지 않은 건물이란 찾아볼 수 없고 곳곳에 「탱크」가 뚫고 지나간 듯한 큰 구멍들을 볼 수 있었으며 폭격에 허물어진 건물은 부지기수, 그러나 길가에 의자를 놓은 노천다방에는 이제 상당수의 시민들이 나와 담소하고 있어 흡사 6·25직후의 우리 나라 도시와 같았다.
특히 인상깊은 것은 이 항구 앞 운하 속의 수많은 고기들이 포성에 만성이 된 탓인지 발을 굴러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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