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복 사건의 피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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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도대체 박영복 사건이란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일개 사기한이 하나의 은행이 아니라 경향 각지의 거의 모든 시중은행을 상대로해서 그것도 한 두 차례가 아니라 4년 안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수시로, 18개의 유령 회사를 꾸미고 1백여장의 신용장을 위조·변조 사용해서 누계 74억4천3백만원이나 되는 거액의 돈을 어엿하게 융자받아 쓸 수 있었다는 이른바 「박영복 금융」이 어떻게 가능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사건의 전모가 점차 세상에 알려짐에 따라 오히려 알 수 없어지는 것은 도대체 이런 사건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고, 그러기 위해서 배후에 얼마만큼 큰 힘이 도사리고 있었느냐 하는 점이고, 그렇다면 이런 새장에서 힘없는 국민은 무엇을 믿고 살아야 되겠느냐 하는 점이다.
박영복 부정 금융으로써 입은 은행의 손실은 크다. 은행의 간부나 행원의 일부가 설혹 이 사건에 불행하게도 말려들었다 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박영복 사건의 제1차적인 피해자는 이 나라의 은행 전체이다.
그러나 박영복 사건의 피해자는 비단 은행에 그치지 않는다. 그 상처는 단순히 74억원에 가까운 융자금 회수 불능이라는 외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박영복 사건의 피해는 훨씬 보편적이며 상처는 훨씬 깊은데 에 있다. 그는 이 나라의 전체 금융기관의 공신력을 땅에 떨어뜨려 놓았을 뿐 아니라 진상은 앞으로 더욱 밝혀져야 되겠지만 이 부정을 밝히고 다스려야 할 기관이나, 공인마저 오히려 이 부정에 연루되고 있는 인상을 줌으로 해서 일반 국민들의 국가 기구에 대한, 국가 생활에 대한 신뢰에는 심각한 내상을 입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국민이 그리고 국가 자체가 피해자인 것이다.
수출입국이라는 대의 밑에 오늘도 전국의 공단에서는 한푼의 외화를 벌기 위해 많은 젊은 여공들이 낮을 밤으로 알고 피눈물 나는 노동을 하고 있는 그 그늘에서 수출을 빙자하여 이런 금융 부정이 자행되고 어마어마한 외화가 권력을 농락하는 몇 사람의 사복을 채우기 위해 해외로 도피되고도 이를 바로 잡지 못한다면 등골이 써늘하다 아니 할 수 없다.
은행감독원의 발표로 어차피 그 부정의 전 규모가 일단 밝혀진 박영복 사건은 연일 신문·방송의 커다란 취급으로 해서 이제는 이를 가릴 수가 없도록 세상에 노출되고 말았다. 참새 같은 입으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고 있는 초등 학교 어린이들의 동심의 세계에서까지 박영복 사건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을 보는 심정은 차라리 이 사건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조차 생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수습의 길은 늦지 않다. 일단 세상에 알려진 박영복 사건은 그에 관련된 모든 배후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철저히 가려내서 그를 법에 의해서 다스리는 길이며, 그럼으로써 국가의 참된 권력과 권위가 건재함을 천명하는 길이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들의 허무감을 불식하고 국가 생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소를 잃고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74억원이 아니라 7백40억원을 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 생활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회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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