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경제 사령탑의 '節稅' 스캔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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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홍콩의 경제 사령탑인 앤서니 렁(중국 이름 梁錦松) 재정사장(부총리격)이 '승용차 스캔들'로 뭇매를 맞고 있다.

재정.금융을 총괄하는 그가 이달 초 세금인상을 발표하기 전에 도요타자동차의 렉서스 고급 모델을 미리 사들여 차량 등록세를 '절세(節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앤서니 렁은 지난 9일 "세금 인상 방침이 결정되기 전인 지난 1월 중순 차량을 구입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세금 절감분의 두 배인 10만홍콩달러(약 1천6백만원)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며 불을 끄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불길은 여전하다.

현지 언론들은 그가 차량 등록시 신고 가격을 낮춰 절세액이 5만홍콩달러가 아닌 9만홍콩달러에 이르며 차량 구입 전에 이미 세금 인상안이 결정됐다는 의혹까지 파헤쳤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앤서니 렁은 지난 10일 사의를 표했다. 둥젠화(董建華)행정수반은 "공직자로서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서면 경고 정도로 넘어가려 했다.

웬만한 나라 같으면 그 정도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17일 입법원(의회 격)은 그를 불러 탈세 의혹을 추궁했다. 홍콩 경찰에서 독직(瀆職)혐의로 정직을 당했던 한 경찰관은 시민 자격으로 부패 척결기구인 염정공서(廉政公署)에 그를 고발했다.

올해 51세인 앤서니 렁은 금융계에서 잔뼈가 굵어 5년 전에 고위 관료로 발탁됐다. 부(富)와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어 '차이예(財爺.부자 아저씨)'란 애칭까지 얻었다. 지난해엔 중국의 다이빙 스타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푸밍샤(伏明霞.25)와 로맨스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그가 지난 2월 젊은 신부에게서 일곱달 만에 옥동자를 얻었을 때 홍콩인들은 "남녀 간에 '속도위반'이야 흔한 일"이라며 너그럽게 보았다. 그에게 최고급 차량이 이미 두 대나 더 있었다는 사실도 거론치 않는다. 사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경제 당국이 연 10조원에 이르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중산층.서민의 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상황에서 '권력으로 사익을 추구(以權謀私)'한 경제 수장(首長)을 용서할 수 없다는 여론이 강하다.

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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