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4)<제자 전택부>|<제33화>종로 YMCA의 항일 운동 (4)|전택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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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독립협회와 ymca>
지난번에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의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운동은 「러시아」 세력을 저지하기 위한 민권 운동인 반면에 YMCA는 항일을 위해 창설됐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립협회와 YMCA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성장했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창설자요 윤치호는 그 후계자요, 이상재는 만민공동회의 의장이였다. 이 세사람은 한국 역사상 최초 민권 운동인 독립협회 거두이다. 그런데 서재필은 정치적 압력에 견디다 못해 다시금 미국으로 쫓겨나가고, 윤치호는 좌천되어 지방으로 밀려나가고 이상재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모두다 YMCA의 창립 총회 때는 가지 못 했다.
그러나 이분들이 한국 YMCA의 상징이며 지도자들이다. 서재필은 미국에 있으면서 YMCA 운동에 가담하여 국내 YMCA 지도자들과 수시로 연락을 했으며, 윤치호는 지방에서 올라와, 이상재는 감옥에서 나와 각각 1904년부터 YMCA지도자가 되었다.
이상재는 독립협회 사건 때문에 두번 체포되었었다. 한번은 1898년에 있었고, 한번은 1902년6월에 있었다. 그 고발의 이유는 이상재와 그의 아들 승인이 공모하여 김정식 이원긍 홍재기 등과 같이 민영환 박정양 등을 수반으로 해서 정부 개혁을 음모했다는 소위 개혁당 사건이었다. 그는 체포된 후 경위원·감옥·재판소 등으로 끌려 다니면서 3년이란 긴 세월을 감옥에서 고생할 때에 이승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승만은 그보다 25년이나 아래인 후배이지만 만민공동회의 동지였다. 이승만은 이미 옥중에서 기독교에 귀의하여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터에 그를 만나 신앙을 고백하게 이상재도 심령의 변화를 입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다른 동지들도 따라서 신자가 되었다.
이것이 즉 역사가 이능화씨의 소위 관신사회신교지시다, 다시 말하면 이때까지의 기독교 신자는 다 비천하고 무식한 무리만이였는데, 정부 고관 출신과 지식인들이 무리 져 예수를 믿는 이것이 처음이란 말이다. 즉 이상재 부자와 이승만을 비롯하여 경무관이었던 김정식, 법부협판이던 이원긍, 개성 군수이던 홍재기 등이 다 신자가된 것이다 그전부터 신자이던 고관 출신은 서재필과 윤치호 두 사람뿐이었다, 그들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해외에 망명 갔다가 신자가 되어 귀국한 사람들로서 국내에서 신자가된 것은 이번이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상재 등이 다 YMCA에 가담했다는 말이다.
즉 1904년2월에 석방되어 출옥했다. 그리고 윤치호는 지방 좌천에서 풀려 상경하면서 무더기로 YMCA에 가담한 것이다. 윤은 부회장이 되고 이는 교육부 위원장이 되고 김정식은 부총무가 되고 다른 동지들은 위원이 됐다. 말하자면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그대로 YMCA지도자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땅속에 묻혀 있던 독립협회가 재생하여 YMCA로 변화되었으며 또 다시 말하자면 독립협회 때는 「러시아」 세력을 꺾는 것이 주목적이었는데 YMCA에 가담할 때는 일본의 침략을 막고 독립을 유지하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때에 같이 가담한 사람 중에 민영환과 이준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헐버트」는 말하기를 『민영환은 비록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YMCA와 기독교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이다』라고 말했으며,「언더우드」 목사 부인도 『그는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할 수 없었을 때이지만 몇몇 각료들이 모인 앞에서 한국의 유일한 희망은 기독교에 있다. 다른 선진국가들도 기독교를 통하여 부강하게 됐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준은 판사 경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나 YMCA에 와서 청년들이 토론회를 할 적마다 심판을 맡아주었다.
예를 들면 『만국 공법이 부여 대포 일발』이란 제목을 걸고 청년들이 우조와 좌조로 나뉘어한 조는 국제 정의를 주장하고 다른 한조는 무력이 제일이라고 할 때에 이준은 언제나 2토론회의 심간을 보아주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민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하였고, 이는 1907년 해외 밀사로 갔다가 그도 역시 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항일 지도자들이 모두다 YMCA 운동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놀라운 사실은 고종의 누님의 아들이며 대원군의 외손자가 되는 조남복 형제가 YMCA에 들어와 성경 반을 조직하고 가르쳤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천주학이라고 기독교를 박해한 한국 「네로」의 후예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해괴한 이야기다. 그는 1905년 가을부터 1주일에 두차례씩 성경 반을 인도했다. 때마침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나라가 막 뒤집히자 이에 실망한 민중은 기독교에 큰 기대를 걸고 YMCA안으로 무리 저 들어왔던 것이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미신화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YMCA는 명실공히 한국인에 의하여, 한국인을 위하여, 한국인의 소유의 성적이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애국한다는 지사들은 모두 YMCA에 기대를 걸고 모여들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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