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예술과 윤리|대표집필 여석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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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예술과 윤리, 또는 예술의 윤리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양자를 기계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미적 가치의 결정으로서의 예술을 윤리라는 전혀 별도의 가치체계와 동일시하고자 하는데 대한 강한 반발이 존재한다.
따라서 예술성과 윤리성이라는 두개의 개념을 두고서 많은 혼란과 오해가 발생되기 쉬우며 때로는 극단적인 의견의 대립이 생기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본다.

<역사·현실·비판의식 필요>
비정한 경우를 들어 한 작가(예술가)가 심혼을 기울여서 자신의 창조적 지혜와 표현을 다한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았을 때 그것이 부도덕하다든가, 사회에 대해 악영향을 준다든가 공격을 받는 일이 왕왕 있다. 이럴 경우 작품이 우수하다는 것과 그것이 부도덕하다는 비평과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또는 없는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설명으로 매우 기본적인 전제를 한 두 가지 두어봄직 하다.
첫째 예술은 이른바「윤리」와는 떠나서 그 가치가 성립된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러나 예술은 미적 가치와 내재적으로 관련되는 의미에서 윤리성을 수반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첫째의 전제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한편의 시, 한 권의 소설 또는 한 장의 그림이 어떤 도덕적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하물며 설교의 의도를 품고 쓰여지며 그려진다는 경우 일부의 예외는 몰라도 일반적으로 생각될 수 없다. 따라서 예술작품 가운데 곧바로 도덕을 찾거나 아니면(대개의 경우) 피상적으로 찾았다고 생각되는 부도덕을 목표로 삼아 비판이나 공격을 가하는 일은 작품을 받아들이는 정당한 길이 아니다.
한 걸음 나아가 작가(예술가)가 추구하는 가치와 진실이 작품에 반영되었을 때 그것이 기성도덕이나 어떤 주어진 윤리강령에 추종하지 않는다 하여 공격하는 일도 부당하다. 오히려 거기 쉽사리 타협·영합함으로써 예술가자선의 성실성울 저버리는 경우예술의 윤리성이 저해 당하는 것을 종종 보는 것이다.
이런 경우의 윤리성이란 바로 위에서 두 번째 전제로서 지적한 예술의 미적 가치와 내재적으로 관련되는 의미의 윤리성이라 할 수 있다. 예술에 있어서 내용(사상·감정)이 먼저 있고 나서 형식(표현양식·「테크닉」)이 성립된다는 입장을 취하거나 형식과 내용을 둘이 아니고 하나로 보는 견해를 따르거나 간에 광의의 작가사상이란 그의 역사의식·현실의식·비판의식을 통틀어 내포하는 것이고 인생을 보는 눈이 수반돼야 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존귀성에 대한 옹호가 전제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본다.
그것이 또한 작품 속의 주제의식을 낳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에서의 윤리가 문제되고 작가의「모럴」이 운위되는 이유가 바로 이점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을 추구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진실하게 파악되는 작가의식이 기성의「모럴」·현실도덕과는 반드시 일치되지는 않을 것이며 나아가 기성도덕의 대로를 굳이 회피하여 새로운「모럴」의 모색이라는 좁고 험한 길을 찾아가는데 작가에게 주어진 임무가 있기도 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술가는 기존 도덕을 계발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며 그가 한 시대의 선택된 인간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광의의 예술의 윤리성을 찾아내 보고자 한다. 위대한 작가·예술가의 경우 우리는 이와 같은 예를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예술과 윤리와의 관계를 고차적으로 파악해서 생각해볼 때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궁극적으로 한 예술가에게 있어 앞서 말한 사상은 곧 윤리로 통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가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롭게 동화되고 자발적으로 우러나오지 않고서는 예술 속의 윤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남의 윤리(사상)를 한 예술가가 손쉽게 빌어서 마치 자기 것인 것처럼 표현해 버렸을 때 그것은 이미 예술로서의 설득력을 결여하게 된다.

<창조적 표현 낳는 성실성>
흔히 무슨「슬로건」을 내세워 문학이나 예술을 표방하는 경우 대체로 생경하거나 도식화되어버려 예술작품으로서의 심화를 얻지 못하게 되는 일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점, 즉 자기 것으로 영감을 얻지 못한 채 해설이나 계몽 또는 설득에 성급하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예술과 윤리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의 하나가 예술가의 성실성이다. 얼핏 생각하면 이 말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덕목같이 들릴지 모르니 여기서 뜻하는 성실성이란 그의 작가의식의 심부에서 우러나오는 것, 그가 예술가로서 진실을 캐내려는 단호한 결의를 두고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곧 창조적 표현으로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안이한 타협이나 편의적인 영합에 항상 저항하는 정신이라고 해도 좋다. 이러한 인간옹호(휴머니즘)에의 중대한 각오 없이, 과연 좋은 예술작품이 산출될 수 있을까라는 의미에서 작가의「모럴」이 문제되어야겠고 예술의 윤리성이 거론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다음으로 작가의 입장을 떠나서 한 개의 예술작품이 향수자(독자·청중·관객)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겠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과 윤리와의 관계를 그 사회적 기능면에서 다시 한번 고찰해 보자는 것이다. 항용 말하여지기를 작품이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이미 하나의 독립된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것이 일반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에 따라 예술과 윤리와의 관계가 거론되는 일이 많은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도 먼저 전제해 두어야할 것은 위에 말한 작가의 사상이 작품을 일관해서, 즉 성실성을 지니고서 새로운「모럴」의 탐구에 임한 것일진댄 거기에 대한 일반 향수자 측의 반응이 어떻게 나오든 그것을 일방적으로 작가의 책임으로 전가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어느 작품 속에 담겨진 내용이 기성도덕에 일부 저촉된다 해서 그 작품이 독자나 관중을 타락시켰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예술가 자신도 시민의 일원인 만큼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여러 가지 현존적 제약의 테두리 밖으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으나 그의 예술가로서의「모럴」이 기성적 틀에 맞지 않는다 하여 부도덕·타락·유해분자란 낙인을 찍을 수는 없다. 때로는 새로운「모럴」의 창조가 작가의 임무이기도 하다.

<폭넓게 공명되는 걸작>
그러나 이리한 원칙론과는 달리 예술작품의 전달 및 향수의 문제에 있어서 실지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첫째로는 작품이 얼마나 폭넓게 공명될 수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이것을 어느 정도 추 체험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예술의 걸작을 많이 갖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광범위한 층에 다같이 받아들여졌거나 받아들여진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향수자 측과의 관계에서 볼 때 한 작품이 일단 완성되었을 때 그들의 상상적 체험 속 깊이 여과되어 공명을 얻고 감동을 받았을 때 비로소 그 작품은 산 것이 된다. 개개의 독자·청중으로 볼 때 작품이 살아있어야 예술과 윤리라는 명제도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점에 예술작품과 그대상의 폭의 상관관계가 성립되는데 이른바 고급예술작품의 경우는「피라밋」형을 이루기 마련인 향수자 층의 저변에다 기준을 두고 그 윤리적 값어치를 따질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작가의 책임 큰 대중예술>
따라서 이 문제는 불가피하게 주어진 사회의 지적·도덕적 수준이 상관관계가 된다. 예술의 일부 소수 향수자 층을 사회의「엘리트」화 하려드는 경향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독자·청중·관객 층의 감상수준의 차이는 쉽사리 메우기 어렵다.
때문에 예술의 향수면에 있어서도 사회전체의 수준향상은 전제요건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 예술가 측에서도 응분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보다 많은 사람의 감상수준을 끌어올리게끔 보다 광범한 대상에 호소할 수 있는 창작의 실천이 아쉽고 그런 의미에서의 표현수단의 개발도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필요이상의 사회적 마찰이 어느 만큼 중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예술의 윤리성 여부를 거론케 하는 대부분의 경우는「피라밋」형을 이루는 향수자 층의 저변과의 관련에서 생긴다. 흔히 쓰이는 용어를 빌자면 대중예술,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대중매체를 전달의 수단으로 삼는 예술형태가 현대사회에서 광범위한 상대를 두고 부단한 접촉을 가지기 때문에 생기는 사회적 작용 속에서 가장 예민하게, 그러나 매우 피상적으로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예술의 윤리성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여기서 예민하게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뜻은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광범하고 도덕적·교육적·풍속적·기타 여러 가지 형태로 그 결과가 쉽사리 전파되어 버리기 때문이며 대중적이기 때문에 그 효과란 것이 무차별적이라는데 있다. 대중소설이 그렇고, 영화가 그렇고, 대중가요가 그렇고, 방송「미디어」가 그렇다. 예술로서는 잡종적 성격을 지닌 반면 현대사회의 총아로서의 그 위력은 강력하기 짝이 없다.
한편 예술의 윤리성과의 관련에서 피상적이라고 말한 연유는 앞서 지적한 바 예술에 있어서의 진정한 윤리성이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작가의 사상과 불가피하게 연결된「모럴」의 문제로 귀착되는 매우 뿌리깊은 것에 반해 대중예술의 경우는 태반이 기성도덕 실천윤리와 관계되는 풍속성의 차원에 문제의 소재가 머무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자의 경우 작가의 책임이 부정적으로 추궁되는 일이 드문데 반하여 후자의 경우는 작가(예술가)에게 책임이 추궁되는 예가 많다는 점에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건전성 외면한 저속취미>
단적으로 말해서 지금 우리사회에서 태반 문제되는 것은 윤리를 다루는데 있어 대중예술의 작가(광의의)가 어떤 윤리성의 내면적 주장을 펼쳐 보자는 데서 말썽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독자·관객·시청자를 타락시키고 그들에게 추종·영합하자는 그 창작태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 가지 비판을 받아오기도 했는데 우리가 보는 바로는 오늘날과 같이 시민사회의 가치체계가 격심한 변화를 거듭할 때 이들 작가들이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매체를 통하여 적어도 주어진 조건의 한계지만 그것을 선용하여 윤리문제를 작품을 통해서 제기·추구하는데 지나치게 태만하지 않았는가 하는데 있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을 소재로 작가가 생각하는 인간형이나 행동유형이나 인간관계의「패턴」을 만들어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대중을 상대로 할 경우 소박한 반면에 광범한 반응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저속취미란 딴것이 아니라 말초적인데 머무르고 무의미한 과장과 감상을 일삼고 삶의 건전성과 성실성을 외면하려고 드는 것을 말한다.
한 걸음 나아가 대중예술이란 개념 자체가 그것을 만드는 사람 자신에게 오해 당하고 있는 듯 하다. 도대체 한 작품을 쓰는데 대중에게 읽히기 위한 것을 쓴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작가 자신을 떠나서, 독자를 의식한 작품이 정말 작품일 수 있겠는가. 어느 의미에서는 소박하디 소박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지 않기 때문에 저급한 영합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최소한의 한계선 불가피>
올바른 의미의 대중성이란 대중이 공동으로 향유할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캐내는데 있는 것이지 부정적인 감정의 남용으로 표현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대중의 윤리의 건전한 면을 계도하는데(피상적인 설교나 떼다 붙여 놓은 듯한 선전이 아니라) 진정한 대중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어차피 대중예술에 어느 한계가 있다면 그 시대, 그 사회의 최대공약수적인 풍속과 도덕에 안목을 두고서 작가는 최소한도의 어느 한계선을 그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한계선을 일탈해서 자신과 향수자 대중을 다같이 타락시키는 일이 없게끔 항상 노력해야만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대중예술의 현실은 이제 그 취미나 감상의 수준에 있어 주는 측(창작주체)들보다 받는 측(독자·관중·시청자)이 더 앞서 있지 않은가라는 우려마저도 낳게 하고있다.
대중을 우롱하지 말고 그들이 식상하지 않게끔 하는 길이 사실은 그 윤리성을 보장하는 가장 지름길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광의의)의 타협한계를 그어주고 지키게끔 해줄 수 있는 여러 관계자들의 협조와 각성이 아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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