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 외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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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8일 내한한 로저즈 미 국무장관을 맞아 열리게 된 일련의 한·미 고위회담은 우리 외교정책의 전환기에 때맞추어진 것이어서 주목되고 있다. 6·23외교특별선언이 있은 후 한·미 고위층의 공식적인 접촉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하고는 가장 밀접한 우방인 미국과는 항상 머리를 맞대고 협의해야할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 하겠으나 근래처럼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겹친 적은 일찌기 드물었다. 유엔 전략을 비롯한 외교면에 있어서의 협조문제, 해수·협상 무드에 따르는 힘의 공백」에 대처할 안보 문제, 미국의 경협과 닉슨 금수조치에 따르는 대한규제 완화 문제 등이 그 중요한 대목들이다.
오늘의 국제 정치상황은 흔히 강대국 정치라고 설명된다. 그 중에도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미·일·소·중공 등 4강의 이해가 가장 밀접하게 저울질되고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도 강대국 중심의 이해조정에 과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이해관계(강대국 관계)로 인해 특수한 이해간계가 소홀히 될 수 없고, 하물며 일반적 문제 때문에 특수지역의 문제(한반도 문제)가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차제에 특별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로저즈 장관은 18일 김종필 총리 및 김용식 외무장관 등과의 일련의 회담을 통해 미국의 대한정책에는 앞으로도 변화가 없을 것임을 밝히고, 6·23선언의 지지와 방위공약의 준수를 거듭 다짐했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이처럼 서울에서 미국의 대북 정책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여 양국의 기존관계를 재확인한 것은 이 싯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며, 우리는 그 확정된 원칙의 구체적인 실천에 기대를 갖는다.
먼저 외교적인 면에서의 실천적 과정으로서는 우선 6·23선언의 현실적 적응을 들어야할 것이다.
정부는 6·23선언을 통해 대 유엔정책의 전환과 이념·체제를 초월한 문호개방 정책을 천명했다. 여기에는 언커크와 유엔군 문제, 그리고 한국에 대한 동·서양 블록 국가의 형평 적인 문호개방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안보이사회사항인 유엔군 문제에서 미국정부는 그 해체에 반대한다는 한국정부 입장에 이견이 없음을 로저즈 장관의 입을 통해 명백히 했으나 문호의 형평개방 문제에 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구체적인 논의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공산권의 문이 한국에 대해 좁은 반면, 미국 등 우방이 북한에 대해 개방의 문을 넓힌다면 해빙·개방의 원칙은 뜻밖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에 한·미간에 더한층 밀접한 외교적 보조일치가 요청되는 것이다.
다음, 안보문제에 있어서 로저즈 장관은 주한미군 병력수준의 유지와 한국군현대화 추진에 계속 노력하겠음을 다짐했다. 그는 동경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현 싯점에서 한국주둔 병력에 대한 아무런 철수계획이 없으며, 한국이 한반도 안정을 위해 행동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질 때까지는 미군의 한국주둔이 계속될 것』 이라고 말했었다.
미군의 한국주둔을 한국민이 영구히 바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단지 동북아시아 평화의 위협요소에 대한 억지력으로서 우리는 주한미군의 당분간 계속 주둔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1950년, 아시아 정세에 대한 미국의 오판이 한국전쟁의 비극을 초래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로저즈 장관이 방위공약을 재확인했으나 정세변화에 따른 그 원칙의 변질이나 그 집행에서의 소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의 정세판단이 강국중심의 일반적 이해관계에 기울어질 때, 한반도에서의 평화가 위협되거나 한국문제가 희생 될 위험성은 항상 있다.
그동안 한·미간의 정치적·외교적 대화에 전혀 소홀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번 로저즈 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한·미 양국간의 솔직한 의견교환을 통해 기탄 없는 충고와 상호이해로써 그 같은 거리가 메워질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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