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나침반] KBS '해피 투게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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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생명이 탄생한 후 그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심정은 한가지일 것이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아라. 새로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제작진의 마음 역시 이와 비슷하다.

백가지 제목 후보 중 딱 하나에 낙점 하는 일이 여간 고단하지 않다. 입에 착 달라붙으면서 프로의 방향성을 드러내 주는 제목을 고르는 일에 골몰하다가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나중엔 이름짓는 회사에 의뢰하기도 한다.

'해피 투게더'라는 제목은 대중문화의 각 장르에 고루 포진해 있다. 'Imagine me and you'로 시작하는 터틀스의 노래가 있고, 왕자웨이 감독의 동명 영화가 있다.

오종록 PD가 연출한 SBS 드라마 스페셜도 눈길을 끌었는가 하면, 오늘 이야기하려는 KBS2의 목요일 밤 11시대 오락프로도 있다. '원로가수' 양희은씨가 꼭 출연하고 싶었다고 속내를 털어놓은 프로이기도 하다.

여러 꼭지가 있지만 역시 이 프로의 중심축은 '쟁반 노래방'이다. 단순하지만 아이디어의 결집 양상이 눈여겨볼 만하다. 출연자들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토크쇼의 소파를 과감히 치워버린 격식 파괴가 신선하다.

화려한 의상 대신 출연자들은 자신의 이름표가 붙은 교복을 입고 나온다. 원래 '쟁반 노래방'은 '학교 가는 길'이라는 꼭지의 소제목이다. 먼저 '책가방 토크'가 벌어진다.

책가방을 검사 당하던 시절엔 감히 털어놓을 수 없었던 소지품(이야기)들이 고스란히 쏟아져 나온다.

지난 주(3월 6일)에는 '이런 류'의 프로에 나올 것 같지 않은 가수 강산에가 윤도현.남궁연과 함께 게스트로 나왔고 그 전 주에는 하춘화.김미화, 그리고 하춘화를 흉내내어 유명해진 개그맨 김영철 등이 나왔다. 오락프로의 십대 편중을 차단한 제작진의 '모험'은 성공했다. (패티 김과 안성기씨도 불러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다. 중요한 건 '끝까지 제대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잘 불러봐야 소용없다. 누군가 자기 순서에 가사 한 글자라도 틀리면 곧바로 쟁반의 공격이 감행된다. 이른바 '팀 스피리트'의 룰이 적용되는 것이다. 예전에 교실에서 불렀지만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동요나 가곡이 레퍼토리다.

노래의 가치를 잊고 산 세대들이 함께 동요를 부를 때 감동은 코끝에서 눈시울로 이동한다. 상업적인 노래는 소모되고 있으나 초등학교 교실에서 불렀던 동요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까닭이다.

'가치'를 버리고 '가격'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즐겁게 체벌을 감수한다.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찾는 과정. 그러고 보니 제목은 '학교 가는 길'이지만 실상은 '인간으로 가는 길'이다.

초등학교 칠판에는 지금도 '떠든 아이들' 이름이 남아 있을 것 같다. 인간이 낡아지면 동물처럼 되거나 기계처럼 된다. 욕심과 의심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거나 체온을 잃고 기계적 판단을 한다.

류시화는 그의 책 '지구별 여행자'에서 '내가 다녀야 할 학교는 세상의 다른 곳에 있었다'라고 고백했다. 쟁반을 얻어맞으며 함께 부르는 노래는 동심으로 돌아가는 즐거운 소풍길의 보물찾기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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