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으로 코너링 향상, 역도로 근력 키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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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호 19면

이상화(서울시청)가 지난달 29일 오후(한국시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2013-2014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스피드 스케이팅 월드컵 3차 대회 여자 500m 1차 레이스에서 힘차게 트랙을 질주하고 있다. 이날 이상화는 37초27을 기록해 1위를 차지했다. [AP=뉴시스]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세계 빙상계는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질주에 깜짝 놀랐다. 과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적이 없었던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이 단숨에 금메달 3개·은메달 2개로 전통의 ‘빙속 강국’ 네덜란드(금 3·은 1·동 3)보다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쇼트트랙에 특화됐던 한국 스케이팅이 스피드로까지 영역을 넓히자 세계 빙상의 판도가 흔들렸다.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 급성장 비결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변이 아니다. 한국의 스피드 스케이팅은 더 빨라졌다. 4년 전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실험과 도전을 이어온 결과다. 올림픽 전초전인 이번 겨울 월드컵 시리즈를 통해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저력이 드러났다. 대표팀을 맡고 있는 케빈 오벌랜드(39·캐나다) 코치는 “현재 페이스만 잘 유지하면 소치 올림픽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밴쿠버 올림픽 직전 열린 2009~2010 월드컵 시리즈에서 한국은 남녀 500m, 남자 1000m에서 16개(금 4·은 5·동 7)의 메달을 따냈다. 소치 올림픽을 앞둔 2013~2014 시즌 월드컵 시리즈에선 남녀 500m를 비롯해 남자 1000·5000m, 남녀 팀 추월에서 20개(금 9·은 5·동 6)의 메달을 따냈다. 남녀 단거리에서 꾸준한 성적이 나왔고, 스피드 스케이팅의 유일한 단체 종목인 팀 추월 종목에서도 메달권 진입에 성공했다.

소치에서 밴쿠버 뛰어넘는 성적 기대
기록도 향상됐다. ‘빙속 여제’ 이상화(24·서울시청)는 여자 500m 월드컵 1차 대회 2차 레이스부터 2차 대회 2차 레이스까지 3회 연속 세계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는 월드컵 1차 대회부터 4차 대회 1차 레이스까지 자신이 나선 대회에서 한 차례도 빼놓지 않고 우승을 차지했다. 밴쿠버 대회 전의 이상화는 ‘우승권’ 선수 중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독보적인 세계 1위다.

(왼쪽부터) 모태범,이상화, 이승훈.

 모태범(24·대한항공)은 월드컵 4차 대회에서 남자 500·1000m를 잇따라 석권해 2관왕에 올랐다. 3차 대회까지 500m에서 은메달 4개·동메달 1개를 따냈던 그는 올림픽 전 마지막 월드컵에서 최고의 성적을 냈다. 4년 전 모태범의 500m 금메달은 기적으로 평가됐지만 이젠 아니다. 확실한 메달 후보 이상화·모태범, 남자 장거리 이승훈(25·대한항공)과 함께 팀 추월 종목에서도 좋은 성적이 기대된다. 소치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은 밴쿠버 대회를 뛰어넘는 성적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성장 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한국 빙상을 진두지휘하는 전명규(50)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은 “우리만의 훈련법이 좋은 성과를 냈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훈련법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도전하고 혁신하는 사람이 세계 1등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 부회장의 말처럼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역사는 혁신적 훈련의 연속이었다.

 한국 스피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쇼트트랙이었다. 20년 이상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쇼트트랙의 기술을 스피드 스케이팅에 이식한 것이다. 밴쿠버 겨울올림픽 감독을 맡았던 김관규(46) 빙상연맹 전무이사는 “스피드 스케이팅은 코너링이 아주 중요하다. 직선 주로의 스피드를 코너에서 얼만큼 유지하느냐가 관건”이라며 “가장 효과적인 훈련 방법을 찾다가 쇼트트랙 훈련을 병행했다”고 말했다.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은 하루 3시간씩 날이 긴 스피드 스케이팅용 스케이트화 대신 날이 짧은 쇼트트랙용 스케이트화를 신고 쇼트트랙 훈련장에서 훈련을 해왔다. 쇼트트랙을 통해 코너워크 기술을 터득한 선수들은 레이스 내내 흔들림 없는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스피드 스케이팅과 쇼트트랙은 이웃 종목이자 경쟁 종목이다. 한국 빙상은 그 경계를 뛰어넘었다. 스피드 스케이팅과 쇼트트랙의 융합 훈련은 밴쿠버 올림픽에서 눈부신 성과를 냈다. 밴쿠버 올림픽 1만m 금메달리스트 이승훈은 1년 전까지 쇼트트랙 대표 선발전에 나섰던 선수였다.

 밴쿠버 올림픽을 통해 융합 훈련 효과를 확인한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팀은 쇼트트랙 훈련 비중을 더욱 높였다. 케빈 코치는 “캐나다에서도 쇼트트랙 훈련을 하지만 한국처럼 제대로 하지는 않는다. 세계 최강의 기술을 자랑하는 쇼트트랙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고 전했다. 대표팀 최고참 이규혁(35·서울시청)은 “쇼트트랙은 코너를 돌 때 허벅지에 걸리는 부하가 엄청나다. 스피드 스케이팅보다 원이 작아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쇼트트랙 기술은 내게도 새로운 도전”이라고 설명했다.

 팀 추월은 쇼트트랙 효과를 특히 많이 보고 있다. 이승훈을 비롯해 주형준(22)·김철민(21·이상 한국체대)으로 구성된 팀 추월 남자대표팀은 이번 월드컵 시리즈에서 랭킹 포인트 220점을 획득해 1위 네덜란드(300점)와 함께 소치 올림픽 톱시드를 배정받았다.

 팀 추월 세 선수는 모두 쇼트트랙 선수 출신이다. 2009년까지 팀 추월 부문에서 세계 10위권에도 못 들었던 대표팀은 쇼트트랙 출신 선수들 덕에 올림픽 메달 후보로 등장했다. 김 이사는 “쇼트트랙을 한 선수들은 스피드 스케이팅만 해온 선수들과 달리 코너링이 좋고 페이스 조절이 안정적이다. 스케이팅 스타일이 잘 맞는 세 선수가 함께 호흡을 맞춘 지 두 번째 시즌에 접어들면서 팀워크도 더욱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종목 경계 넘어선 복합 훈련법 적중
스피드 스케이팅의 훈련은 종목 경계도 뛰어넘었다. 소치 올림픽을 앞둔 선수들은 개별 능력을 더 키우기 위한 ‘맞춤형 훈련’으로 한층 더 성장했다. 이승훈은 지난여름 모교인 한국체대 역도부 선수들과 훈련했다. 레이스 막판 기록이 떨어지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역도 훈련이 근육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다고 들었다. 그냥 역기를 든 정도가 아니라 진짜 역도부원이 됐다는 생각으로 훈련했다”고 했다. ‘역도의 힘’으로 그는 1, 4차 월드컵 5000m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모태범·이상화는 500m와 1000m를 넘나들고 있다. 500m와 1000m는 근본적으로 경기 운영 방식이 다르다. 500m가 스타트부터 한꺼번에 스피드를 내서 레이스를 펼친다면 중거리 종목 1000m는 중반까지 페이스를 조절하다 막판에 스퍼트를 낸다. 둘은 두 종목을 소화할 수 있는 체력 훈련, 레이스 훈련을 함께했다. 이상화는 “500m를 잘 타기 위해 1000m 훈련도 병행하고 있다. 덕분에 레이스 막판까지 스피드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길렀다”고 했다. 이상화는 10대 때부터 남자 선수들과 훈련하며 파워를 키웠다.

 이상화·모태범·이승훈은 스무 살 갓 넘은 나이에 세계 정상을 경험했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4년을 다시 기다리고 준비했다. 이상화는 “이미 올림픽 금메달을 따봤기 때문에 정말 편안하게 내 레이스만 하자는 생각으로 링크에 선다”고 말했다. 모태범은 “2010년엔 아무것도 모르고 준비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올림픽에 대한 부담 없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니까 결과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소치 올림픽을 앞둔 이들에게서 여유가 느껴진다. 그래서 더 믿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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