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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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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봉 조희용의 저서 「일산외사」에 나오는 김홍도전을 읽어보면 『단원은 그 풍도가 아름답고 성품이 뇌락불기해서 마치 신선중의 인물과 같았고 그는 산수 인물 화훼 초충 영모에 이르기까지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신선도를 잘 그려서 독보적인 화격을 이루어 그를 따를 이가 없었다』고 기록하고있다. 말하자면 단원은 근래 풍속화의 대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고 또 산수화가의 거장으로서도 손꼽히지만 그의 장기가 역시 신선도에 있었다는 그 시대의 평가를 잘 전해주는 기록이다. 이병철씨 소장의 이 「군선도병」8폭은 단원이 남긴 신선도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대작으로서 선인들의 남녀군상을 각기 세 무리로 분립시켜서 구성함으로써 그 쾌적한 포치는 별격을 이루고 있으며, 각개 군상들이 보이는 율동적인 연동감이라든지 개개 선인들의 탈속한 풍모는 숙련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천부의 격조라고 할만하다.
비교적 굵고 힘있는 묵선에 나타난 용필도 주저가 없고 농담을 가려서 단숨에 그려 내린 필세 또한 굴탁이 없는 흔연한 작품이다.
이 병풍말미에 「병신 춘사 사능」이라는 낙관이 있어서 이것이 그의 나이 36세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장년기의 호탕한 기개를 여실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단원은 이러한 신선도 대가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의 자연을 간절하게 아끼고 그 정서를 올바르게 인식했던 귀한 작가였다. 또한 그 당시 점차로 서울 화단에서 시도되기 비롯한 남종화풍의 참뜻을 올바르게 체득해서 종래의 북종화풍에 조화시킨 단원 독자적인 절충양식을 이룸으로써 한국특유의 산수화 정형을 세운 사람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서민사회의 생업을 주재로 삼은 풍속화의 개척은 그 속에 나타난 서민감정의 기미와 차원 높은 해학의 미와 함께 오늘날 그의 선구자적인 화업으로서 새로운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고 할만하다.
단원은 1745년생이었으며 그 졸년은 분명치는 못하나 대략 l810년 전후한 시대에까지 재세했으리라는 증좌가 그의 화업속에 남아있다. 그는 김해 김씨 만호 김진창의 증손이었으며 자는 사능, 호는 단원 외에 단구, 서호 고안거사, 첩취옹 등을 썼으며 훗날 음보관으로 연풍현감을 지냈었다. 지본매폭(118.7cm×48.8cm) <최순우(국립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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