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9산사태」가 남긴 외톨이 12세 소녀 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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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8·19」물난리 때 서울 영등포구 본동산3번지 산사태로 순식간에 고아가 된 김효신 양(12·본동 국교 6년)등 어린 5남매가 두 달 가량을 가까스로 지냈으나 더 이상 생계를 이을 수 없어 12일 고아원과 보육원 등으로 뿔뿔이 헤어지게 됐다.
효신 양의 아버지 김기현씨(52)와 어머니 김덕진씨(35)는 지난 8월19일 상오7시40분 한창폭우가 쏟아질 때 각각 집 앞개울을 치고 부엌에서 밥을 짓는 순간 뒷산이 무너져 그 자리서 흙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그동안 맏딸인 효신 양은 도 완 양(10·본 동 국교 4년) 병도 군(7·본 동 국교 2년), 병묵 군(5), 병관 군(3)등 네 동생을 돌보며 아버지가 생전에 심어놓은 호박과 채소를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왔다. 어느 날은 이웃아주머니들에게서 얻은 밥 한 그릇으로 5남매가 한 숟갈씩 나누어 먹으며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급우들은 학용품을 보내왔다. 구호 품으로 라면과 밀가루도 더러 받아 주린 배를 채웠다.
그러나 12살의 어린 나이로 4남매의 가장 노릇을 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효신 양은 학교를 제대로 나갈 수가 없었고 3살 짜리 막내가 잠자리에서 어머니를 찾으며 보챌 때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동생들의 앞날이 걱정되기도 했다.
효신 양이 다니는 명수대천주교회의 이민상 신부(28)는 이들의 딱한 소식을 전해듣고 효신 양의 담임 선생인 이성숙 교사(25)와 상의 끝에 이들 남매를 고아원에 알선키로 했다.
지난9월25일 아침 할 수 없이 수녀의 안내로 어린 병묵·병관 군이 먼저 인천 모 보육원에 보내졌고 12일 아침에는 도 완 양과 병도 군이 대구 모 고아원으로 떠났다.
철없는 동생들이『빠이빠이』인사를 나누며 수녀의 손에 이끌려 집을 떠날 때 뜨거운 것이 가슴을 치밀어 목이 메었다고 효신 양은 흐느꼈다.
산사태후 무너진 집터에 세운 임시「블록」집 단간 방에서 지내온 효신 양은 12일 밤 도완 양이 꽂아 놓고 간 노란「코스모스」를 멀거니 바라보며 깊은 시름에 잠겨있었다. 당장 살아나갈 길이 막연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추석 때 5남매가 용미리 공동묘지에 있는 부모의 무덤을 찾은 것이 5남매의 마지막 외출이 되었다.
아버지 김씨가 고향인 함흥에서 1·4후퇴 때 단신 월남한 탓으로 효신 양에겐 서울에는 위로 해줄만한 친척조차 없다.
외톨이가 된 효신 양은『언젠가 우리남매는 잘살게 되어 반드시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채영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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