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불「옵세르바퇴르」지 「사회생태와 혁명」 토론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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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오늘날의 경제성장은 과연 인류를 행복하게 결속시킬 것인가. 이 명제는 금년에 세계적인 논의를 불러일으킨 최대의 「이슈」이다. 세계각국이 고도의 성장을 지향하고 있는 반면에 공해를 비롯한 환경파괴, 소비자 물가의 상승 등 생활파괴가 수반됨으로써 무엇을 위한 경제성장인가 심각한 회의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프랑스」의 「라·누벨·옵세르바퇴르」지는 지난 6월 「사회생태와 혁명」이란 주제의 토론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에는 EC (유럽 공동체) 「시코·맨스홀트」위원장, 대학투쟁의 이론적 지주가 되고있는 「헤르베르토·마르쿠제」, 사회학자 「에드몽·메르」 「필리프·장마르크」, 영국의 생태학자 「에드워드·골드스미드」등이 참가, 전인류적 위기를 진단하는 논쟁을 벌였다. 다음은 그 요지이다. <편집자>
20세기의 최대 문제는 인구의 폭발적 증가이다. 이대로 간다면 서기 2천년에는 현재의 지구상 인구 35억이 70억으로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인구 만큼이 불과 앞으로 30년 동안에 출생한다는 얘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류는 차례차례 원재료를 고갈시키고 있으며 물질적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싸움에 아주 열중해 있다.
이 「발전」이라고 일컫는 것 때문에 인류는 세계파괴의 가능성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식량문제는 확실히 불안을 주고 있다. 「스톡홀름」에서 FAO (「유엔」식량농업기구)의 대표는 『인간은 살충약이나 제초제를 안 쓰고 살수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투입은 많아질수록 그 농약이 개울과 바다로 계속 흘러 들어가 끝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는지 묻고 싶다. 또 그는 이 지구상에 있는 13억ha의 황무지를 생산적으로 개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개간을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 해수를 담수로 만들던가 혹은 눈부실만한 어떤「에너지」가 필요하다. 또 단일재배를 하기 위해 삼림을 개간해도 좋은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한정된 양밖에 없는 지구상의 원재료는 고갈될 것이 명백하다. 이런 조건임에도 자원부족과 싸우기 위한 경제성장이 요청되고 그 성장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도 역설적이다.
가령 어느 공장에서 그 공장이 빚은 공해를 방지하기 위해 투자한다고 하자. 그러자면 투자하는 만큼을 증산해야 하는데 그 생산증가 자체가 새로운 오염을 가중하는 결과가 된다. 지옥과 같은 악순환의 연속이다.
다른 한편 빈곤한 국민과 부유한 국민에 관한 것도 인간사회의 큰 문제 거리다. 세계적으로 풍요한 나라가 25%인데 비해 나머지 75%는 빈곤에 빠져있다.
나는 「칠레」에서 열린 「유엔」 무역개발회의에 참가한 바 있는데 여기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개발도상국의 대표들은 한결같이 『경제성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과연 물질적 생활수준을 끌어 올렸다해서 생활의 질적 측면도 개선되는 것인가. 아마 빈곤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부유한 나라의 국민은 1인당 연평균 소득이 2천4백「달러」이고 개발도상국에서는 1백 80 「달러」에 불과하다. 만약 우리가 성장정책으로 개발을 촉진한다면 부유한 나라에서는 3천 6백 「달러」를 초과하게 되며, 그 동안 빈곤한 나라에서도 2백 80「달러」에 이르게 된다. 이같이 되면 격차는 더욱 확대되는데 그 간격을 메우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구제수단은 새로운 목적을 향하여 우리들의 사회가 방향을 잡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즉 GNP(국민총생산)를 한층 증대시켜 그 증가한 것을 빈곤한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향상하는데 돌려주는 방법이다. 동시에 그들 생활의 질적 측면을 개혁하고 자연보존이나 예술·문화의 발전에도 쓰여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빈곤한 나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부유한 나라에서는 성장된 결실의 주요부분을 신속히 그들에게 양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빈곤한 나라에서도 생활의 질에 관하여 논의하기 시작하고 있는데, 그들이 필요로 하는 연평균 소득은 2백 80 「달러」가 아니라 6백 80 혹은 1천 80 「달러」가 되면 괜찮겠다고 한다.
이 같은 노력에는 불가불 하나의 기구가 필요한데 불행하게도 이 세계에는 그런 역할을 할 기구가 아직 없다. 「유엔」은 그 행동이 가맹제국의 완전한 주권에 구속돼 있는 한 서로 불가침의 원칙이라는 쇠사슬에 발묶여 있으므로 그 역할에는 무능력하다. 다만 「유럽」에는 썩 잘된 조직이 있으며 다행스럽게도 공동체의 초국가적 의식 속에서 그것이 발전되고 있다.
새로운 목적을 추구하려는 이 논쟁은 자본주의의 현대사회의 기성조직 속에서는 불가능하므로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추구하기에 앞서 현 사회의 생태를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외지서>

<차례>
「맨스홀트」의 주장(상)
「마르쿠제」의 주장(중)
기타 학자들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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