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제26화>경무대 사계(102)|우제하<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망명
4.19의 충격으로 이 박사의 건강은 눈에 보이게 나빠졌다. 하야전후해서 자주 설사를 했다.
이화장에 와서도 평소처럼 아침저녁 산책과 정원 손질을 계속했지만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야 때 아무 준비 없이 나왔기 때문에 생활비도 넉넉지 못했다.
하야직후에는 발전기를 돌릴 휘발유조차 없어 박비서가 경비경관에게 전에 하던 대로 반말로 기름을 얻어오라고 했다가 『여기가 경무당인줄 아느냐. 왜 반말이야』하고 대드는 촌극이 벌어진 일도 있다. 국회가 생활비로 매달 50만원을 국고에서 지출하기로 결의했으나 이 박사의 망명으로 지급되지 않은 기억이다.
이 박사는 하야후 여러 외국원수로부터 위로서한을 받았다. 특히 장개석 자유중국총통은 주한대사를 이화장에 보내 위로 친서를 전달해 왔다. 이 친서를 받은 이 박사는 며칠후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각하의 부드럽고 따뜻한 우정에 넘치는 말씀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본인은 대통령 직을 사임한 것을 조금도 괴롭거나 섭섭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젊은 학도나 국민들이 부정한 것을 보고 그냥 덮어두지 않고 생명을 걸고 피를 흘려서까지 부정에 항거했다는 것을 본인은 높이 평가하며 무한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런 국민들로 이룩된 대한민국은 훌륭하게 발전할 것이며 큰 희망이 있은 나라로서 우리 국민은 크게 발전해 나갈 국민임을 본인은 이번 일은 통해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략』
한달 남짓한 이화장 생활 중 국민에게 보내는 담화문을 계획한 일이 있다.
요즘 일분기자가 국내에 들어온다는데 이은 시기상조며, 국내의 소란이 끊이지 않으니 안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박사는 이 담화를 구술한 뒤 즉시 공보실에 갖다주라고 했으나 공보실에서 전 대통령의 담화를 내줄 리가 없어 몇몇이 이를 간신히 만류했다.
이렇게 한 달을 지낸 뒤 이 박사부처는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5월29일 아침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할아버지의 망명준비는 극비리에 진행돼 사흘 전부터 다시 이 박사 비서가 된 황규면씨와 나까지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나는 그 전날 아침에도 평소와 같이 이화장에 갔다. 할머니는 출타 중이었다. 두어 시간 머무르다 나오는데 할머니를 태운 자가용1호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나를 본 할머니가 전에 없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길래 무척 기분이 좋았다. 아마 떠날 준비를 모두 끝내고 오느라 마음이 유쾌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이화장에서 『오늘새벽에 외출하셨는데 아직 행방을 모르겠다』는 전화가 왔다. 부랴부랴 차를 타고 가보니 두 분은 하와이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나보다 일찍 달려온 황비서도 두 분을 만나지 못했다. 황씨와는 전날 D일보의 이 박사 망명 설 보도를 보고 『별 소리가 다 많다.』고 일축했던 터였다.
황씨는 그러면서도 기분이 찜찜해 일찍 귀가했다고 한다. 그날 밤 통금시간이 가까워 이화장의 경비책임자인 김종완 경감에게서 급히 메모를 전할게 있으니 사람을 보내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황씨는 군인이던 조카를 보냈다. 김 경감으로부터의 메모에는 『두 분이 내일 아침 일찍 외국으로 갈 모양인데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니 이화장에도 오지 말고 알고만 계시라』고 적혀 있었다.
끌탕을 하느라 황씨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한다. 그런데 새벽 5시가 좀 넘어 이화장으로 빨리 오라는 전갈이 왔다. 뛰다시피 이화장으로 가보니 두 분이 탄 차는 이미 공항으로 떠난 뒤더란 얘기였다. 황씨에게는 마담으로부터 재산목록 작성과 재산관리를 부탁한다는 편지만이 남아 있었다.
측근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하듯이 떠난 늙은 할아버지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져 견딜 수 없었다.
이 박사는 그 전날까지 장화를 신고 삽으로 도랑을 친 것이나 사랑하던 해피까지 두고 간 것을 보면 돌아올 생각으로 간 것이 분명했다. 후에 알아보니 이 박사 부처가 하와이를 떠난 경위는 대충 이렇다. 이 박사가 하야하자 하와이 교포인 윌버트 최란 분에게서 마담에게 휴양 겸해 하와이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마담은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매카나기 부대사부인과 의논했다.
매카나기 대사도 이에 찬동하고 과정수반인 우양에게 5월26일 이런 취지를 전했다.
물론 우양도 대찬성이었다. 우양은 이수영 외무차관에게 극비로 마담을 만나 매카나기 대사의 얘기를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사실을 확인한 우양은 이 차관이 남에게 시키지 말고 직접 관용여권을 발급하도록 일러 28일 아침 이 박사에게 여권이 전달됐다. CAT전세기도 이날 저녁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 박사의 망명을 지켜본 사람은 우양. 이 외무차관과 경비경관, 그리고 이화장 문밖에서 망명할 기미를 알아채고 밤을 새운 K신문 보도진 뿐 이었다.
수심에 싸인 이 박사 부처를 태운 전세기는 29일 상오 8시45분 김포공항을 떠났다. 살아서 다시 조국의 땅을 밟으리라던 이 박사는 5년 후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