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태풍」 전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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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작년 10월의 은행장실 경비 조사 이후 연타를 맞고 있는 금융 가는 26일부터 열리는 시은 주주 총회를 계기로 또 한번 거센 인사 파동에 휩쓸려 들었다.
24일 상오 수출 진흥 확대 회의가 끝나자 재무부는 곧이어 은행장 회의를 소집, 농협을 제외한 전 금융기관 임원들의 사표를 25일까지 제출토록 긴급 지시했는데 이 갑작스런 조치에 금융가는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사태 진전에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재무부 측 해명은 『경질될 사람들만 사표를 받으면 곧 윤곽이 드러나고 또 임기가 끝나지 않은 사람들의 경질 가능성도 있어 불가능한 조치였다.』지만 금융계는 이를 『대폭적인 인사 개편의 전 단계』로도 받아들이고 있다.
한마디로 이른바 「관치 금융」의 좋지 않은 관습이 또 한번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금융 기관 임원들의 일괄 사표 얘기가 파다하게 퍼진 것은 24일 하오 5시쯤-.
모 은행의 L상무는 그때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사표를 낸 사람이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겠느냐』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행장급에선 이미 이 사실을 통고 받은 후인지라 『아직 사표낸 사실은 없다』면서 『금융인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놓아야 한다』고 거의 체념하는 표정이었다.
또한 『지금의 금융 상태는 어느 사람이 맡아도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작년 10월 이후 열심히 뛰었는데도 이 모양인데 사람만 간다고 해서 잘 되리라는 생각은 오히려 혼란만 조장 할 것』이라고 반발의 뜻을 나타냈다.
그리고 모 행장은 『금융계 안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큰 문제』라고 묘한 암시를 던져 주기도 했다.
○…재무부 당국자들은 일괄 사표 제출이 남 재무 출국 이전에 이미 짜여진 「스케줄」 대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밝히긴 했지만 어느 정도의 폭으로 인사가 단행될지는 모두 함구하고 있다.
그러나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남 재무 출국 이전에 전무·이사 급은 은행장의 추천을 받아 대충 정리가 되고 은행장 급은 공란으로 고위층에 보고되었기 때문에 인사 봉투를 열어 보기 전에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는 얘기다.
다만 행장 급은 제일은행의 고태진 전무가 승진하여 조흥은행장으로 전출하는 것으로 끝날 것 같다.
이사진은 행장에게 「러더쉽」과 임원진의 연대 책임을 지우기 위해 행장의 의견을 최대한도로 반영, 각 은행장이 낸 임원의 고과표에 따라 임기에 관계없이 개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직급의 수평 이동은 하지 않고 행내 기용이 대부분이며 2기 이상의 중임은 허용되지 않으리라는 점이 다시 한번 강조됨으로써 상당한 수의 임원들이 금융가를 떠나게 될 가능성도 비춰지고 있다.
그런데 다른 소식통들은 제일은행의 고 전무가 행장으로 승진하는 것은 틀림없으나 조흥은행이 아니라 특수 은행인 K은행이라는 설도 있고 조흥은행의 문 행장도 구제될 가능성이 많다는 설도 한때 유력하게 금융 가를 누비기도.
특히 한은 총재 경질설도 관계자들이 강력하게 부인하지를 않고 있는데 그 후임은 70년 말에 외환 은행을 물러난 H씨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번 인사의 초점은 대폭적으로 단행되리라는 점 외에 문 행장의 퇴진과, 이와 관련된 한은파의 퇴색설이다.
감사에 대한 인사가 확대될 것은 틀림없고 한은 부장급에서 3명이 내정 됐다고 하나 문 행장의 퇴진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측이 많다.
문 행장은 그 동안 남 재무의 대 시은 시책에 자문 역을 맡아 왔고 개인적으로 장관을 가장 많이 만난 것으로 알려진데다 작년 10월 금융 정상화 조치를 고위층에 보고할 때 유일하게 참석한 시은 행장이었고 사실상 시은의 「리더」격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의 갱송을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남 재무 출국 때 공항에 나온 유일한 시은 행장이었으며 떠나기 전에 귓속말을 한참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서 주목을 끌고 있다.
따라서 문 행장의 거취 문제를 남 재무의 영향력과 직결시켜 생각하는 측도 없지 않다.
○…이번 행장급의 사표는 사실상 두 번째가 되는 셈이다.
작년 금융 정상화 조치 때 금년 3월말까지 불건전 채권을 책임지고 정리하겠다는 시한부 사표를 냈다가 이를 6월말까지 연장 결의한바 있는데 이번에는 전번 시한부 사표와는 별도로 또 제출하게 된 것이다.
전 임원의 사표가 밝혀지자 행원들까지도 인사 문제에 관심이 쏠려 모두 들뜬 분위기인데 어느 행장 비서실 직원은 『아무리 정부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전원 사표를 받는다고 하지만 일생에 한번 쓰기도 거북한 사표를 휴지 조각처럼 취급해서 강요하는 것은 너무 심한 것 같다』고 불만을 덜어 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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