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하늘의 전쟁(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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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사의 각고>(2)
한국 공군의 정비사들이 무진 고생을 하면서도 가장 보람을 느낀 것이, 역시 강릉 기지에서 제10 전투 비행 전대가 1951년10월11일부터 독자 출격을 감행하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물론 정비사들은 이보다 앞서 미군의 도움 없이 기장을 맡으며 비행기 정비를 해왔지만 조종사들도 독자 출격을 하게 되자, 양자의 호흡은 완전히 일치된 것이다. 특히 이때 「하이틴」의 소년 병으로 F-51 전투기 정비에 정열을 불사르던 정비사들은 장년이 된 오늘날에도 현역으로 이제는 「제트」기를 정비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공군 정비사의 「산증인」인 동시에 「응달의 보배」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은 강릉 기지를 중심으로 한 이들 정비사의 이야기.

<밤새껏 애쓰다 엉엉 울고>
▲김현식씨(당시 하사·현○○기지 근무=중령·44) <51년9월 말에 강릉 제10전투 비행 전대로 갔습니다. 이때는 우리 공군이 독자 출격을 앞두고 한참 준비에 바쁠 때였지요. 우리 정비사들이 F-51 전투기의 기장을 하면서 시운전까지 한 것은 진해에 내려가서부터고, 그전에는 중요한 것은 대개 미군이 했어요. 우리 정비 기술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 같아 중대장 서무갑 대위를 비롯한 정비사들이 속으로 분하게 여겼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강릉 기지에서는 밤을 새며 정비하는게 보통이었어요. 이수중 중사는 밤새 F-51 기름「호스」를「메인·카뷰레터」에 있다가 안되니까 엉엉 울기까지 했어요.
영하 7∼8도의 추위에 기름은 새어 옷에 젖고, 꽁꽁 언 손으로 밤새껏 「카뷰레터」를 가지고 씨름을 했으니, 울만도 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며칠 계속해서 철야 작업을 해도 누구 하나 꾀를 부리거나 불평을 하지 않았어요. 조종사와는 그야말로 친형제 이상으로 서로 돕고 아꼈어요.>
▲김진황씨(당시 하사=현○○기지사 근무=중령·44) <강릉에서 나는 김두만 소령이 타는 「머스탱」을 맡아서 정비했어요. 이때는 승호리 철교를 비롯한 북한 각지에 연일 출격해서 정비사들도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습니다. 자랑이 아니지만 내가 정비한 김 소령 기는 이 동안에 출격 때마다 큰 전과를 올리고 아무 사고 무사히 돌아와 여간 기쁘지 않았어요. 부식이 모자라 어부에 탄피를 주워다 주고 동태를 얻어다 먹기도 했지요.>
▲한만석씨(당시 1등병·현○○전투 비행단 정비 대대 소속=준위·40) <강릉 기지의 정비사 숙소는 비행장에서 좀 떨어진 솔밭 속에 있었는데 「산돼지 소굴」이라고 불렀어요. 왜 그런 이름을 불렀는지는 모르겠어요. 51년4월 내가 입대할 때는 정비에 관한 특기 부호가 없었고 현지 부대서 교육을 받았지요. 그때 인기가 무척 엄해서 같은 계급이라도 고참 앞에서는 담배도 못 피웠어요. 우리 기부들을 가장 아껴 준 것은 기장이었어요. 휴가 갈 때에는 기장은 자기 군화와 새 군복을 내주고 용돈까지 마련해 주었으니까요. 조종사들도 마찬가지였지요.< p>

<출격기 안 돌아오면 굶기 일쑤>
시내에 갔다 오면 밤중에 정비사 숙소에 와서 자기 기장과 지부를 몰래 깨워 사 온 음식이나 선물을 주었어요.>
▲박해종씨(당시 1등병·현○○전투 비행단 정비 대대 소속=준위·40) <5백「파운드」 폭탄을 다는 장비차는 강릉 비행장에 1대뿐이었고 그나마 수동식이었어요.
이 한 대를 가지고 21대의 「머스탱」에 폭탄을 달아야 하니 밤새우는 것은 보통이었지요. 폭탄 1개는 4명의 정비사가 목도로 운반했는데 비행기에 2개씩 달고 또 그 숫자만큼 비행기 옆에 갖다 놓아야 했어요. 폭탄을 달고 나면 어깨가 퉁퉁 부어 오르곤 했어요. 겨울에 기관 총구를 닦는데 손이 트지 않도록 자동차 기름을 발랐는데 그래도 손이 터져 옴두꺼비등처럼 됐어요. 한번은 휴가로 집에 갔는데 차마 부모에게 손을 보일 수가 없어 계속 장갑을 끼고 있었지요.
부모님이 이상하게 여기고 어디 손 좀 보자고 해서 할 수없이 내 보였더니, 어머님은 눈물을 흘리십디다. 정비사들의 비행기에 대한 애착심은 모두 대단했어요. 출격했다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 정비사들은 「라인」에 나가 대기합니다. 4대 편대 중에서 3대밖에 안 나타나면, 모두 얼굴이 노래져요. 혹시 자기가 맡은 비행기가 사고 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뿐이었지요 자기 비행기가 영 안 오면, 그 정비사는 몇 끼씩 밥을 굶기도 했어요.>
▲김태대씨(당시 1등병·현○○전투 비행단 정비 대대 소속=준위·40) <정비반도 무장반·통신반·일반 정비로 나누어져 있는데 분류 방법이 재미있었어요. 신병이 부대에 오면, 체구가 크고 힘께나 있어 보이면 무장반에 보내는 식이었지요. 무장반은 폭탄과 「로키트」탄을 메야 하기 때문에 약골은 견뎌 내지 못합니다. 우리 기부들은 정비사라고 하지만 실은 기장의 보조역에 지나지 않았지요. 반은 심부름꾼, 노무자였다고나 할까요.>
▲김영환씨(당시 1등병·현○○전투 비행단 정비 대대 소속=준위·41) <나는 강릉 기지에서 88호기의 기부였어요. 그때 기지에는 시동 장비가 1대밖에 없었습니다. 겨울에 「엔진」이 얼어붙어 시동이 안될 때에는 정말 죽을 지경이었어요.
시동 장비는 일선 정비반에는 없고, 야전 정비반에 비치돼 있었는데 내 비행기에 먼저 시동을 걸려고 보통 새벽 3시쯤 일어나 논두렁길을 걸어 야전 정비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대기했어요, 줄선 순서대로 장비를 얻어다 시동을 거는데 늦었다가는 기장한테 호된 기합을 받았지요.

<하룻밤 36대 정비하기도>
내 비행 기장은 유종화 상사였는데 이분은 유난히도 책임감이 강했어요. 한번은 우리 비행기가 출격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오일」뚜껑이 열려 기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조종사의 시야가 가려져 활주로 옆에서 뒤집힌 일이 있어요. 정비 잘못이라 생각하니 죽고 싶더군요. 기장인 유 상사가 이틀이나 밥을 안 먹었으니 내 심경이야 어떠했겠습니까.>
▲이상태씨(당시 1등병·현○○전투 비행단 정비 대대 소속=상사·42) <나는 대구에서 미군기에 붙어 무장 교육을 받다가 강릉으로 갔는데 처음에는 f-51전투기가 8대밖에 없어 좀 초라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후에는 자꾸 사천에서 올라옵디다.
그때 유병주 대위란 군수 장교가 있었는데 한번은 내일의 대 출격을 앞두고 36대를 새벽까지 모두 정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정비사들이 부족한데다가 워낙 시간이 촉박하니까 유 대위가 직접 나서서 밤을 새워 36대의 정비를 모두 끝마쳤어요. 그리고는 유 대위는 3일 동안 일어서지도 못한 일도 있었어요.>
▲이기행씨(당시 1등병·현○○전투 비행단 정비 대대 소속=상사·40) <시동을 걸 때, 겨울에는 「프러펠러」를 어깨로 20회는 돌려야 하는데 이 일이 여간 고되지 않았어요.
눈이나 비가와 바닥이 미끄러울 때는 여러 번 넘어졌지요. 기부들이 시동을 걸고 나면 기장이 나와 올라 타보는 것이었어요. 강릉 기지는 배수 시설이 잘 안돼 있어 비만 오면 야단이었어요. 한번은 온 비행장이 물바다가 되고 날개까지 물이 찬 일이 있었어요. 물이 빠진 다음 정비하다 보니, 날개 속에 뱀이 들어 있고 실탄 상자 속에도 도마뱀이 들어 있더군요.>
▲이정완씨(당시 1등병·현○○전투 비행단 정비 대대 소속=소령·40) <강릉은 특히 기상이 나빠 초겨울에도 눈이 많이 왔는데 아주 질색이었어요. 폭탄은 보통 밤에 운반해다가 비행기에 다는데 저장고 없이 그냥 야적해 두어 얼어붙은 게 많았어요. 무장 반원들은 폭탄 뒤에 달린 날개를 잡고 것을 뗀다고 밤새껏 흔들며 운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요.
조종사들은 출격이 끝나고 오면 우리 정비사를 데리고 그대로 외출해 술을 사주기도 했어요.>
▲김신성씨(당시 1등병·현○○전투 비행단 정비 대대 소속=상사·40) <「머스탱」전투기에는 폭탄 2개에다 5「인치」 「로키트」포탄 6개와 「캘리버」 실탄 1천8백발을 장치하는데 실탄은 양어깨에 2백발씩 메면 어깨가 축 늘어졌어요. 잠은 하루에 4시간 정도 자면, 잘 자는 편이었지요. 정비사들은 자기 비행기 조종사가 1백회 출격 기록을 내는 게 가장 보람있는 일 이었어요. 그런 기록을 내면, 조종사는 물론 정비사도 훈장을 받았으니까요. 내가 강릉에 있을 때 정비사인 나학수 상병이 유치곤 대위의 2백회 출격 기록 때 둘이 함께 훈장을 타는데 여간 부럽지 않더군요.>

<요즘 사병들은 「이유」가 많아>
▲박해종씨(당시 1등병·현○○전투 비행단 정비 대대 소속=준위·40) <나는 6·25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었고 군대가 어떤 것인가를 알았어요. 내가 처음 군대에 들어 간지 한달 후에 출생한 사람들이 지금 나와 함께 군대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때 이유를 달 줄 몰랐고, 또 절대로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무」에서 「유」를 만들다 시피 했어요. 후배들이 매사에 이유 다는 것을 볼 때 너무나 거리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겪은 것과 같은 고생을 지금도 한다면, 아마 모두 못 견뎌 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주요일지(1951년9월29·30일·10월1일)
※9월29일 ▲양구 북방의 아군 약간 후퇴 ▲미국 방문중인 「브래들리」 <합참본부 의장「리지웨이」 사령관과 요담 ▲미 국회 60억불의 군사 시설안 동의.
※9월30일 ▲금성 남방 고지서 국군1천4백여명의 적 사살 ▲「스탈린」, 중공 정권 수립 2주년에 모택동에 축전.
※10월1일 ▲단양의 능선에 대한 적 반격 격퇴 ▲「브래들리」 합참 의장, 「리지웨이」와 함께 한국전선 시찰 ▲중공군 「티베트」 수도 「라사」에 진주.
◆정정=본 연재 제313회의 본문 기사 중 신유협 중위는 소령으로, 이종국 대령은 소령으로 각각 바로 잡습니다.
※알림=본 연재 기사 내용에 대해 의견이나 이견이 있는 분은 서슴지 말고 서면이나, 전화로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화 (28)8211(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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