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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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시대를 따라 그 대표적인 인물의 유형은 바뀌어진다. 시대가 사람을 만들어 내고, 또 사람이 시대를 윤색해 나간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의 유형 역시 세대를 따라 달라진다.
오늘의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아직 없다. 젊은이들에게 누구를 존경하느냐고 물으면 아무도 선듯 대답하지를 못한다. 어느 지도자나 위선의 탈을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보고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만큼 오늘의 세대가 비뚤어진 때문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것이다.
일제하의 세대처럼 불행한 시대에서 산 사람들도 드물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육당 최남선이 있었고, 단재 신채호가 있었다. 육당의 딱한 변절은 우리에게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가혹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반대로 단재의 고난에 찬 일생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일으켜 준다.
그가 대련 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다. 그의 「조선상고문화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중단을 부탁했다. 그 이유는 마지막 손을 보지 못한 초고를 내놓기가 학자적 양심에서 부끄럽다는 것과 일제의 연호를 쓰는 신문에 연재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또 그가 임종하기 바로 전에 신원이 확실한 보호자만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형무소 당국에서 말했다. 그의 옛친구이자 친일로 기운 한 보호자가 나섰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친일파의 도움을 받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요새 우리네 눈으로 보면 그는 사서 고생한 느낌조차 든다고 한동안 그는 북경의 <중화보>에 논설을 썼었다. 이게 그의 유일한 밥줄이었다.
어느 날 『의』자 한자가 빠져서 발표됐다. 단재는 단연 집필을 중단하고 말았다. <북경일보>에 글을 발표하고 있을 때에도 신문사 측에서 원고 중에서 글자 두 자를 교정해 냈다. 그러자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저희들이 어찌 감히 나의 글을 고치느냐』면서 계속 게재를 거부하였다.
이런 인물을 이제는 우리네 주변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그만큼 강직한 인물이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일까, 혹은 시대가 타협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는 굽힐 줄 몰랐다. 중국 망명 생활 10년이 넘어도 중국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할 만큼 옹고집에 찬 그였다고 그의 삶이 오류에 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정치노선에 있어서나 사학에 있어서나-.
그러나 어떤 오류라도 덮어주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그는 통이 큰 인물이었다. 또한 굳은 신념으로 일관되어 있었고, 조금도 언행에 표리가 없었다. 그가 위인이 못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를 가질 수 있던 세대는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새삼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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