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민속 널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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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나라의 음력 설날에는 여러 가지 민속놀이가 많지만은 여성들만의 놀이로서 전국적으로 행하여지는 것은 널뛰기가 있음을 본다.
경기도지방의 널뛰기를 보면, 기다란 널판을 짚 묶음, 또는 가마니 뭉치 위에 절반을 걸쳐놓고 널만 양끝에 한사람씩 마주 올라서서 서로 구르면서 몸 솟음을 하여 반사적으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며 뛰는 것인데, 몇 자까지 올라간다. 그리하여 어느 쪽이든 힘이 빠져 지치는 것을 낙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경상도의 널뛰기를 보면 가마니 뭉치 위에 널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양끝에 구덩이를 깊게 파서 하므로 경기도지방 널뛰기보다는 높게 올라가는 것이 특색이라 하겠다.
젊은 여자가 빛깔이 찬란한 치마·저고리의 아름다운 옷을 입고 새해 새날의 공중을 서로 번갈아 솟았다가 떨어졌다 노는 양은 참으로 한 폭의 그림인 것이다.
이 널뛰기에 대하여 17세기 이조 헌종 때 사람, 이규경은 판무희 변증설에서 『유구국지략』을 인용, 유구에는 정월에 계집아이들 놀음에 판무(널뛰기)라는 것이 있어 우리 풍속의 놀음과 서로 같다 하였고, 18세기 정조 때 사람 유득 공은 그의 『경도잡지』에서 유구의 판무희는 이조 초에 유구 사절이 우리 나라에 왔었을 때 우리의 널뛰기를 보고 본받아 전한 것이라고 하였다.
『유구국 지략』이란 청나라 상서 주황이 지은 것이며, 이 널뛰기의 일문은 『중산전신록』에도 기록되어 있거니와 『중산전신록』은 1792년에 청나라의 책봉사로서 유구에 갔던 서소광의 『유구 여행기』인 것이다.
유구는 1879년에 일본에 병합되기 전까지는 왕국으로서 우리 나라와는 고려 말년에서부터 이조 중종 때까지 그 사이에는 그네들 사절의 내조가 빈번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표류민이 한동안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다가 돌아간 일도 있었으니 이 동안에 유구의 판무희는 이들에 의하여 전하여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 널뛰기와 비슷한 것으로는 서양의 「시소」가 있으나 여성들만의 놀이는 아닌 것이고, 또 꼿꼿이 서서 뛰는 우리의 널뛰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라고 보이나 이것은 필시 뒷날 누가 이 널뛰기를 보고 응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이 널뛰기는 외국「서커스」단에서도 노는 것을 볼 수 있으므로 한국 독특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옛날 상무시대부터 전승되어 오는 민속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으리라 생각된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의 여성들은 매우 활발하여 남성들과 갈이 말도 타고 격구 같은 것도 예사로 하였었다.
그러한 때의 민속의 하나였던 것이 이조 중엽 이후 내외 법이 심하여지자 여자들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간바 되매, 설날명일 때에나 그 옛 풍속이 남아서 전승되어 왔던 것인데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성히 행하여져 왔던 것이다. 이 널뛰기는 근년에 와서는 외래의 새로운 각종 유희의 도입으로 인하여 이제는 쇠퇴일로에 있음을 보거니와 아직도 농촌사회에서는 그 유풍이 남아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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